필자는 여전히 아이언맨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전율을 기억한다. 무기업체를 이끄는 화려한 억만장자 토니 스타크. 그는 일련의 위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최첨단 슈트를 개발하여 악당과 맞서는 아이언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기자회견 자리에서 토니 스타크가 본인이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장면은 여전히 회자되는 히어로 영화의 명장면. 이후로도 마블 스튜디오는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전율의 페이즈 1’
마블 스튜디오에서 개봉하는 히어로 영화 시리즈에는 ‘페이즈’가 존재한다. 페이즈는 단계를 의미하는 영단어로 넓은 마블 세계관을 이해시키는 그들만의 작품 공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페이즈 1은 오리지널 마블 히어로들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들이 많다. 토니 스타크의 <아이언맨>, 개구쟁이 천둥의 신 토르가 처음 등장하는 <토르>, 미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정의의 사도 캡틴 아메리카의 탄생을 다룬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져>가 대표적.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마블은 2012년에 페이즈 1을 상징하는 작품을 탄생시키는데, 7년 동안 이어지는 장기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던 <어벤져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세계관의 확장, 쏟아지는 호평’
2008년 개봉한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2012년 개봉한 <어벤져스>까지, 마블 스튜디오의 페이즈 1 작품들은 마블의 시대가 열렸음을 공공연하게 알렸다. 거리에는 마블 히어로가 새겨진 옷과 신발, 인형이 쏟아졌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마블의 작품들을 무한 반복 재생했다. 그렇게 모두가 페이즈 2의 시작을 기다렸고, 마블 스튜디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페이즈 2의 시작을 알린 작품 역시 가장 인기가 많은 히어로 아이언맨을 다룬 <아이언맨 3>였다. 12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토니 스타크의 내면과 혼란, 깨달음까지의 과정을 담았는데 반응은 뜨거웠다. 아이언맨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흥행 수익을 기록했고, 국내에서만 900만 명이 넘는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 아이언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블 스튜디오는 우주로 향했다. 2014년 거대한 세계관의 확장을 담은 영화가 개봉했으니, 바로 새로운 캐릭터가 대거 등장하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다. 생소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던 만큼 흥행 수익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유쾌하고 통쾌한 스토리는 많은 팬층을 만들었고, 앞으로 이어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를 기다려지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 뒤, 페이즈 1의 끝을 장식했던 <어벤져스>의 두 번째 작품이 공개됐다. 막강한 인공지능 로봇 ‘울트론’과의 사투를 그린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여 돌풍을 일으켰고, 이어서 마블 스튜디오는 몸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독특한 히어로 ‘앤트맨’을 공개하며 페이즈 2를 마무리했다. ‘도르마무, 도르마무’
페이즈 1과 페이즈 2를 지나 대망의 페이즈 3가 시작됐다. 페이즈 3의 스타트는 아이언맨이 아닌, 캡틴 아메리카가 나섰다. 그리고 또 다른 최고 인기 히어로가 탄생했으니, 강력한 마법으로 무장한 외과의사, 닥터 스트레인지다. 마법사가 한바탕 휩쓸고 간 후에도 마블은 쉬지 않고 새로운 히어로를 선보였다. “와칸다 포에버!”를 외치며 등장한 블랙 팬서, 우려를 잠식시키며 등장한 스파이더맨까지 모두 호평받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토르 : 라그나로크>, <캡틴 마블> 등 페이즈 3의 다른 작품들도 연달아 홈런에 성공하면서 마블 스튜디오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2018년에 개봉한 <앤트맨과 와스프>는 전작인 <앤트맨>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는 혹평을 들으며 ‘마블도 실패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앤트맨과 와스프>의 혹평에도 마블 페이즈 3는 역대 페이즈들 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그 이유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임팩트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 2018년에 개봉한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와 입을 틀어막게 하는 충격적인 결말로 언제나 승리하는 히어로 영화의 뻔한 클리셰를 파괴했다. 인피니티 워의 충격이 여전하던 가운데 개봉한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은 마블 스튜디오를 끔찍한 혹평의 늪에 빠지도록 만드는 원흉, ‘멀티버스(다중우주)’ 소재가 메인이었지만 역시나 적절하게 활용하며 큰 호평을 받아냈다.
‘여전히 기억나, 시작은 이때부터였지’
그렇게 영원히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 것 같았던 마블 스튜디오가 하락의 길을 걷게 된 건 페이즈 4에 접어들었을 때부터였다. 잘나가던 마블이 미끄러지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멀티버스(다중우주)’와 ‘디즈니+’.
‘마블 영화 이해하려면 디즈니+ 구독하세요’
2019년, 넷플릭스의 성장을 부러워한 월트 디즈니는 자체적인 구독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를 출시했고, 2021년에는 한국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했다. “마블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고? 너무 좋아!” 시작은 좋았다. 인기 애니메이션 작품을 다수 보유했던 디즈니의 명성 덕분에 국내에서도 구독자 수를 빠르게 확보해 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마블 최대의 ‘악수’가 될 줄은.
마블 스튜디오는 월트 디즈니의 자회사다. 당연하게도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마블 작품들도 공개됐다. <완다비젼>, <팔콘 앤 윈터솔져>, <로키>를 연달아 공개했다. 여기서 문제는 해당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세 개의 작품이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출시된 후에 마블 스튜디오는 극장에 <블랙 위도우>를 공개했다. 페이즈 1부터 등장한 오리지널 히어로의 배경에 대한 작품이었기에 호평을 받았지만 성과는 좋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296만 관객 수를 동원하는데 그쳤다. 이후로 <왓 이프…?>, <샹치와 텐링즈의 전설>, <이터널스>, <호크아이>까지 네 개의 작품이 디즈니 플러스와 극장을 통해 공개됐다. 결과는? 알다시피 처참했다. 심지어 <이터널스>에는 한국 배우 ‘마동석’이 출연했음에도 부실한 내용 때문에 혹평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마블을 ‘손절’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마블 영화는 다 재밌지’라는 편견이 깨진 것과 동시에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너무 많은 작품을 봐야 된다는 부담감에 팬들이 떠나가기 시작한 것. 연속된 마블의 실패로 실망감은 눈덩이처럼 쌓여갔고, 이는 곧 디즈니 플러스 구독자 수의 감소와 영화의 흥행 실패로 이어졌다.
결국 페이즈 4의 마지막을 장식한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 마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배우 채드윅 보스만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했고, 결국 국내 210만 관객 수라는 참혹한 성적표를 받게 됐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구독자들 중에서 <변호사 쉬헐크>, <웨어울프 바이 나이트>, <미즈 마블>, <문나이트>라는 작품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 그만큼 처참히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소 부자연스럽게 첨가된 여성향적인 내용은 오히려 반감을 사는 역효과를 낳았다. ‘기울어진 배,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까?’
혼돈과 절망의 페이즈 4가 지나가고, 2023년 현재는 페이즈 5가 진행 중이다. 페이즈 2부터 시작됐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대단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Volume 3>가 개봉했고, 천천히 두터운 팬층을 쌓아왔던 만큼 찬사와 함께 만족스러운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 <시크릿 인베이전> 모두 흥행 실패. 한번 기울어진 대중들의 마음이 얼마나 되돌리기 어려운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마블은 미래를 보고 있다. 개봉을 앞둔 <블레이드>는 특히 큰 관심을 받고 있는데,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인 만큼,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의 등장과 같은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가’에 승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도 <캡틴 아메리카 : 뉴 월드 오더>, <아이언하트>, <썬더볼트> 등 다양한 작품이 출격을 대기 중이다.
과연 마블 스튜디오는 억지스러운 다양성 추구, 너무 복잡해진 세계관, 허술하고 개연성 부족한 스토리, 뻔하고 지루한 흐름 등 끝없이 쏟아지는 혹평의 고리를 끊어내고,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