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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릴리 슈슈 좀 그만 찾아

블랙 이와이, 그리고 화이트 이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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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바로 이와이 슌지 감독의 2001년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여전히 에테르 속에만 머물러 있는 당신, 이제는 조금 다른 온도의 영화들을 만나볼 차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세계는 두 가지 색으로 나뉜다. 어둠과 상실, 단절의 정서를 담아낸 ‘블랙 이와이’, 그리고 청춘의 설렘과 그 미묘한 감정들이 유영하는 ‘화이트 이와이’. 이 두 가지 색은 뚜렷이 구분되기보단, 물처럼 서로 스며들고 겹쳐지며 각각의 작품들 속에서 그 농도를 달리한다.

블랙 이와이는 끝자락 어딘가에 위태롭게 서있는 청춘들을 그리고 있다. 삶은 아름답지만,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을 터.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또한 블랙 이와이에 속한다. 영화 속 청춘들은 폭력과 고립, 그에 따른 무력감 속에서 ‘에테르’라는 환상에 기대어 버틴다.

피크닉

폐쇄병동에서 만난 세 사람, 코코, 사토루, 그리고 츠무지. 이들은 성경에서 지구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떠난다. 종말은 끝내 오지 않고, 결국 코코는 자살로 스스로의 종말을 맞이한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지금도.

언두

이와이 슌지 감독의 <피크닉> 바로 다음 작품 역시 블랙 이와이에 해당한다. 영화에는 작가 유키오, 그리고 그의 애인 모에미 두 인물이 등장한다. 권태로움을 느낀 유키오는 키스 중 치아 교정기를 빼낸 모에미에게 무언가 허전하다고 말한다.

이후 모에미는 신경쇠약에 빠져 반려 거북이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것을 매듭으로 묶기 시작한다. 결국 강박성 긴박 증후군을 진단받은 모에미. 집에 오는 길에 모에미는 유키오에게 1분이 넘도록 키스하지만, 유키오는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의사는 유키오에게 그녀를 묶어두길 권하고, 모에미는 더 강하게 묶어달라고 청한다.

다음날 아침, 모에미는 사라졌고 유키오의 온몸은 꽁꽁 묶여있다. 희미해진 사랑은 결국 어떻게 무너지는가. 사랑을 나누었던 집은 이제 속박과 파멸의 공간이 되었다.

한편 화이트 이와이는 그 반대편에서,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던 감정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러브레터

에디터에게는 첫사랑과도 같은 영화가 있다. 겨울이 되면 닳고 닳을 때까지 지겹게도 이 영화를 꺼내봤으니 말이다. 그런데, <러브레터>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타루의 겨울이 자꾸만 떠오를 수밖에 없을 테다.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홋카이도, 시간의 틈 사이로 오가는 편지들, 그리고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 이와이 슌지 감독은 과거 말로 다 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4월 이야기

<러브레터>의 겨울이 눈으로 뒤덮인 기억이라면, <4월 이야기>의 봄은 벚꽃잎 만개하는 계절의 시작을 알린다고 할 수 있겠다.

스무 살 우즈키는 대학 입학과 함께 낯선 도시, 도쿄에 도착한다.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다. 오래도록 짝사랑해온 선배 야마자키와의 만남을 위해서다. 시작의 순간은 언제나 서툴지만, 설렘이 가득하다. 

그런데 영화에는 특별하다고 할 만한 사건이 없다. 1시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 게다가 야마자키 선배와의 만남이 시작되는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자신의 기억 속 묻어두었던 시작의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면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

립반윙클의 신부

그리고 블랙과 화이트,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작품 <립반윙클의 신부>가 있다. 팬들은 이 영화를 ‘그레이 이와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감독 본인은 확실하지 않은 색깔의 영화는 만들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오늘도 난, 거짓말을 잔뜩 해버렸다.”

가상의 SNS ‘플래닛’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에게 잔뜩 거짓말을 늘어놓은 나나미. 진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나나미는 결국 다시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

하지만 플래닛에서 만난 인물 ‘아무로’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정체 모를 ‘립반윙클’이라는 인물과 친구가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삶에는 ‘블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이트’도 함께 공존한다.

블랙과 화이트로 나누어지긴 하지만, 이와이 슌지 영화의 온도는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다. 때로는 서늘하고, 뜻밖에 따뜻함이 전해지기도 하기 때문.

여름이 왔다. 각기 다른 계절로 담아낸 청춘과 성장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바로 그의 영화 한 편을 꺼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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