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거장의 자살 시도 소식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으로 다가올 터. 게다가 그 사유가 흥행 실패일 경우에는 더욱이 말이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그의 자살 미수 사건은 실패로 끝이 났고, 이후 다시 카메라 뒤에 선 그는 연이어 대작을 발표하며 거장의 자리를 지켜냈다.
구로사와 아키라. 그는 유년 시절부터 미술과 러시아 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미술학교에 진학했던 아키라. 이 두 분야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세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감독으로 데뷔 후 톨스토이와 셰익스피어, 막심 고리키 등 러시아와 서구 문학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일본의 정서와 결합시켜 수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아키라는 특히나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내 관점과 심리는 <백치>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도스토예프스키만큼 삶에 대해 진솔하게 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 구로사와 아키라

불운 속에 걸작이 탄생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소설 『덤불숲』과 『라쇼몽』 두 편을 각색해 제작되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나생문 아래, 한 남자가 비를 피하려 이곳에 왔다. 그곳에는 승려와 나무꾼이 있다. 세 남자는 최근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건은 나무꾼이 사무라이의 시신을 발견한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사망한 사무라이를 두고 이를 목격한 이들의 진술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들의 진술이 모두 다르다. 무당을 불러 사망한 사무라이의 진술도 듣지만, 그 또한 다른 진실을 이야기한다.

영화 <라쇼몽>은 한 가지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증언을 펼치며, 이 형식을 통해 진실의 모호함에 대해 탐구한다. 지금에서야 <라쇼몽>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스크립터였던 노가미 데루요에 의하면 이 작품은 ‘불운의 작품’이었다고.
촬영 후 편집과 녹음 작업을 진행하던 중 화재 사고가 두 건이나 일어났다. 하마터면 필름이 소실되어 영화가 모두 사라질뻔했던 것이다.
그렇게 악재가 이어졌는데, 개봉 직후 반응마저 냉담했다. 그 누구도 이 작품이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을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이어서 발표한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영화 <백치>마저 악평이 쏟아졌다. 결국 다이에이 필름은 그에게 차기작 취소를 통보했다.

그날,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간 구로사와 아키라는 아내로부터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작품이 영화제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라쇼몽>이 세상에 나온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개인의 성취를 넘어, 일본 영화사에 있어서도 큰 변곡점이 되었다. <라쇼몽>의 성공을 필두로 일본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영화가 미국 극장에서 상영되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을 위시로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등의 감독들도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이들은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아키라, 먼 길을 떠나다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키루>, <7인의 사무라이>, 그리고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등의 작품으로 유수의 영화제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인정받은 그는 자신의 제작사인 ‘구로사와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는 제작비 초과로 인한 위험을 아키라에게 떠넘기기 위한 도호 영화사의 전략이었다.
그의 제작 방식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제작비’였다. 탄탄한 자본과 투자 없이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상업 영화’ 아닌가. 게다가,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 영화계에서 이단아와도 같았다. 일본의 전통적인 정서보다는 서구 문학과 서부 영화에서 영향을 받아 작품 세계를 구축했기에 일본 내에서는 ‘너무 서구적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일본 영화 산업 전반이 위기를 직면한 때였고, 수익이 우선시되는 구조 속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점차 고립되었다. 그의 이상주의적 접근은 환영받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 영화계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외면받은 그는 할리우드에서 감독 제안을 받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도라 도라 도라>의 감독직에서 중도 해임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도데스타덴>은 흥행에 참패했다.
그는 결국 자살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미수에서 그쳤지만, 그의 영화 인생과 커리어는 깊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다시 일어선 구로사와 아키라
침체기로 접어든 구로사와 아키라를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소련이었다. 모스필름이 그에게 감독직을 제안해 아키라는 블라디미르 아르세네프의 비문학 작품 『데르수 우잘라』를 바탕으로 영화 <데르수 우잘라>를 연출했다. 후에 그는 자서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강이 오염되면 알을 낳기 위해 다시 상류로 올라갈 수 없게된다. 그런 연어 한 마리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소련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캐비어를 낳기 위해 먼 길을 갔다. 이렇게 해서 1975년 영화 <데르수 우잘라>가 탄생했다.”
<데르수 우잘라>는 모스필름과 일본 다이에이 필름의 합작으로 제작되었고,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다시금 세계 무대에 올랐다.

구로사와 아키라에게는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존경하던 후배 감독들이 있었다.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아키라의 복귀를 위해 직접 제작자로 나서 제작비를 조달해 완성된 작품이 바로 <카게무샤>였다. 이 작품으로 그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위상을 되찾았다.

이후로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계속되었다. 75세에 <란>을, 80세에는 자전적 색채가 짙은 <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영화 인생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0년,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 구로사와 아키라가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 무대에는 그를 오랫동안 존경해온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가 함께 올라 그의 업적을 찬사했다. 이 순간, 전 세계의 영화인들은 ‘거장들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뜨거운 경의를 표했다.

“나는 아직 영화를 잘 모르겠다.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 영화를 만들며 이해해 보겠다.” –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80세의 구로사와 아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