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영화나 드라마란 기승전결이 확실해야 보는 맛이 일품. 은유적 표현과 색채로 잔잔한 흐름을 통해 막을 내리는 영화들이 있다면, 줄곧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하는 영화도 있다. 그 시작엔 절대 빠지지 않는 주인공, ‘악역'이 있다.
풋내 가득한 하이틴 드라마 <가십 걸>의 영원한 Queen B ‘블레어 월더프'부터, 사랑을 담아 도끼를 드는 사이코패스 <미저리>의 ‘애니 윌킨스'까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악으로 치닫는 그녀들을 모아 소개한다.
가십 걸 : 블레어 월더프 (레이튼 미스터)
영화 속 허상과 현실 세계를 막론하고 10대 시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오는지 모를 ‘불안정함’ 그 자체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친구의 성공을 질투하면서도 시련에 부딪힌 주인공을 위로하며 그 옆을 지키는 <가십 걸>의 ‘블레어 월더프(이하 블레어)’.
그녀가 뱉은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는 역대 필모그래피 속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아닐까. 블레어는 세계 최고의 부촌인 어퍼 이스트사이드 중에서도 최상류층으로, 패션 디자이너인 어머니를 둔 그녀는 ‘말 말 말' 그 자체인 인물. 최고의 여왕 ‘세레나'의 오른팔이지만 그녀를 끌어내리기 위한 갖은 술수는 셀 수도 없다. 본인이 최고여야 하지만, 세레나 탓에 늘 2인자로 밀리는 그녀는 사실 극 중 최고의 여왕벌이자 신 스틸러. 공주 머리띠와 함께 하는 그녀의 푼수 같은 성격에는 알고 보면 깊은 조예와 지식이 함께 한다. 꽤나 시끄러운 학교생활에는 늘 그녀가 중심에 서 있지만, 아이비리그를 목표로 하는 극 중 내용은 블레어의 완벽한 ‘엄친아'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
캣우먼 : 페이션스 필립스 (할리 베리)
누구나 비밀스러운 속 사정이 있기 마련. 최고의 뷰티 기업 ‘헤데어' 사의 그래픽 디자이너 ‘페이션스 필립스(이하 페이션스)’는 사내 개발 상품에 치명적인 독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윽고 청부 살인의 위협을 받던 페이션스는 제3자에 의해 살해당하고 고양이들의 신비로운 능력을 얻으며 환생하게 된 것.
극 중의 히로인인 헤데어 모델인 ‘로렐’은 회사의 얼굴마담이지만, 오래된 연차 탓에 신인 모델에게 밀리게 된다. 회사의 주력 상품이 신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역이용해 되려 협박을 하는 그녀. 아름다움 뒤에 감춰진 구린 속내는 비단 캣우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고양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 지금의 밈처럼, 복수를 위해서라면 캣우먼은 경찰과의 피 튀기는 혈투전도 서슴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지배되지 않는 그녀의 약한 과거는 죽고, 가면으로 태어난 악한 캣우먼. 자유로운 그녀의 몸짓과 걸음은 ‘캣워크' 그 자체로, 움츠려 들어 있던 과거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방해되는 모든 것들에 발톱을 드러낸다.
미저리 : 애니 윌크스 (캐시 베이츠)
영화의 제목과 동명의 소설을 쓰는 작가 ‘폴 셀던(이하 폴)’은 시리즈 속 여주인공이 죽는 완결을 끝내고 운전을 하던 중 눈보라에 휩싸인다. 사고로 정신을 잃은 그를 구한 건 <미저리>의 애독자, ‘애니 윌크스(이하 애니)’.
과거에 간호사였던 그녀의 살신성인으로 폴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애니의 과잉보호는 더욱더 심해지고, 불안감만 커지게 되는 폴. 어느 날 <미저리>의 마지막 스토리를 알게 된 애니의 광기는 그때서부터 시작된다.지나침은 독이 된다고 했던가. 어떻게든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조여오는 그녀의 광기는 폴의 목숨 앞까지 치닫게 된다. 그녀가 그에게 집착하던 것은 그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의 소설 <미저리>에 대한 연민.
엉망으로 향해 가는 소설의 결말은 마치 그녀와 그를 보여주는 듯한 스토리 전개가 아닐까. 더불어, 주인공의 법칙은 절대 쉽게 죽지 않는 것. 치열한 난투극 끝에 애니는 숨을 거두고, 폴은 살아남게 된다.
원초적 본능 : 캐서린 트라멜 (샤론 스톤)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그 장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던 전설의 영화, <원초적 본능>. 범죄 소설가인 ‘캐서린 트라멜(이하 캐서린)’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그를 심문하는 형사 ‘닉’이 캐서린이 펼치는 위험에 빠져들며 벌어지는 에로틱 미스터리다.
극 중 심리전을 벌이며 경찰들을 가지고 노는 캐서린이 다리를 번갈아 꼬며 농락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도 오묘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장면. 특히나 거짓말탐지기도 거뜬하게 통과하는 그녀는 ‘사이코패스'의 정석과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토탈 리콜> 외에는 별다른 흥행작이 없던 그녀가 야심 차게 복귀한 작품. 모두가 거절했던 <원초적 본능> 시나리오를 낚아챈 샤론 스톤은 <원초적 본능>으로 섹스 심벌이라는 아이콘을 부여받으면서도 여러 논란을 안게 된다. 동성애자를 살인에 미친 사람으로 그리는 모습이 불편하다는 현지 관객들의 반응.
더불어 <원초적 본능>으로 인해 양육권 소송에서 패한 그녀지만, 그녀가 ‘캐서린'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영화를 촬영하면서 매우 불안해하며 연기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후문도 있지만, 그녀의 움직임 하나만으로 일렁이는 주인공들의 감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 : 레지나 조지 (레이첼 맥아담스)
동물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란 ‘케이디'는 ‘레지나'가 군림하는 미국의 고등학교에 전학을 오게 된다. 케이디를 위협의 존재라고 생각한 레지나는 곁에 두며 그녀 위에 올라설 계획을 세우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수업 시간에 '애런'을 만난 케이디. 애런은 레지나의 전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남 주기는 아까웠던 레지나는 그들을 분리해놓기 위한 권모술수를 온갖 펼치게 되었고, 이에 케이디는 슬슬 레지나에게 복수의 향연을 시작하기 이른다.모든 하이틴 영화의 중심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 있었다. 주인공이었던 ‘린제이 로한'을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등극시켰고, 출연진들의 모든 패션과 헤어는 당시 최고의 유행 모음집. 특히나, 극 중 교내의 모든 가십을 담아낸 ‘Burn Book’은 현재까지도 다양하게 재조명되며 영화의 인기가 여전할 정도다.
니플 패치가 달린 것만 같은 우스꽝스러운 옷도 극 중 유행으로 만들어 버린 레지나. ‘Mowalola’의 22년 S/S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슬리브리스 탑 또한 그녀를 모티브로 한 옷으로 당시 영화를 연상케하며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