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을 사랑하는 이들의 역사 속에서 끊긴 적 없는 논쟁이 존재한다. ‘뭐가 근본인가?’
뭐가 뭔지 따지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익숙해진 티셔츠 한 장에도 시초가 있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저해하는 카피 문제를 관통하면서 누군가의 지적 허영심을 치켜세워주기도, 패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논쟁거리다. 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재밌다는 것.

타임리스 근본 아이템을 구매하면, 수많은 장점도 존재한다. 내가 산 아이템을 ‘어느 제품에서 영감을 받았고, 오마주 했고, 이래서 예쁜 아이템이다’ 굳이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얘네가 먼저 시작했어”로 설명을 끝내도 충분히 모두에게 익숙한 제품이기 때문이다. 클래식한 아이템이기에 트렌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는 충동 소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너무나 대중화되어 근본을 따질 필요를 못 느끼지만, 굳이 따지자면 근본이 있는 패션 아이템. 패션으로서 대중화를 가장 먼저 시킨 브랜드의 제품을 소개한다.

라코스테와 폴로 랄프로렌이 ‘폴로셔츠’를 두고 벌인 해프닝과 함께 토트백, 페니로퍼 등 당신의 근본력을 조금 더 업그레이드해줄 아이템들이 있다.
❶ 폴로 랄프로렌이라니, 억울합니다

시작은 올드머니, 프레피 룩 트렌드였으려나. 고급 스포츠 승마를 즐기는 금수저들이 자주 착용했던 ‘폴로셔츠’가 트렌드의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폴로셔츠 하면 자연스레 ‘폴로 랄프로렌’을 떠올린다. 브랜드명부터 폴로라니, 근본 냄새가 풀풀 나지만 폴로셔츠의 폴로는 버버리 코트처럼 브랜드명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폴로셔츠는 기성품으로서 셔츠를 대중화시킨 ‘라코스테’가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테니스로 전 세계를 평정한 프랑스 선수 ‘르네 라코스테’. 격식을 갖춘 테니스 복장이 불편했던 라코스테는 폴로셔츠를 착용했다. 폴로셔츠는 승마 스포츠 ‘폴로’ 경기를 할 때 주로 입던 옷이었다. 라코스테는 폴로 선수가 아닌 테니스 선수, 그의 폴로셔츠는 ‘피케 원단’으로 만들어 시원했고, 경기 중 셔츠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긴 기장으로 만들어졌다.

1926년, US 오픈에서 폴로셔츠를 입고 우승하며 세계 1위까지 달성했던 그의 옷은 자연스레 대중들의 눈을 홀렸다.
여기서 돈 냄새를 맡은 섬유 제조업자 ‘앙드레 질리어’는 1933년, 라코스테와 함께 브랜드 ‘라코스테’를 설립하고 피케셔츠를 대량 생산했다. 최고의 스타가 자주 입는 옷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라코스테의 폴로셔츠는 승승장구했다.
폴로셔츠가 유행하니 다양한 브랜드에서 폴로셔츠를 만들어 판매했다. 그런데 폴로셔츠를 테니스 셔츠라고 명명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지도 모를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폴로 랄프 로렌’의 탄생이다. 제품명으로 잘 사용하고 있던 ‘폴로’가 그냥 브랜드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폴로 랄프 로렌 역시 트렌드 아이템이었던 폴로셔츠를 제작했다. 라코스테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스포츠 ‘폴로’를 라코스테만의 단어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이젠 셀 수도 없이 많은 브랜드에서 폴로셔츠를 제작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 폴로셔츠의 폴로는 은연중에 브랜드 폴로 랄프 로렌을 뜻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시작이 그렇다는 것이지, 폴로 랄프 로렌의 폴로셔츠와 라코스테의 폴로셔츠 모두 하나 사두면 트렌드 타지 않고 입을 수 있는 타임리스 아이템이다.
❷ 기억하세요, 선글라스는 레이밴
최초의 에비에이터 선글라스는 아메리칸 옵티컬의 미 육군 항공대용 ‘D-1 선글라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패션 아이템으로서 최초로 대중화시킨 것은 ‘바슈롬(Bausch & Lmob)’의 ‘레이밴(Ray-Ban)’이다.
시작은 역시 군용이었다. 더 높이,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게 된 군용 항공기에서 시야를 가리지 않고 눈부심을 줄여줄 렌즈가 필요했고, 미 공군은 바슈롬을 찾아가 특수 렌즈를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금속 프레임으로 재설계하여 ‘레이밴 에비에비터’라는 이름으로 민간에게 홍보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맥아더 장군이 레이밴 에비에이터를 착용한 사진들이 널리 퍼지며 유행이 시작됐다. 이후, 플라스틱 프레임의 ‘웨이페어러’와 함께 패션 선글라스의 대중화를 이끌어냈고,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선글라스가 탄생했다.
❸ 페니 로퍼, 그냥 신었다면

간편함으로 많은 남자들의 선택을 받은 ‘페니 로퍼’. 편안한 신발인 만큼 ‘로퍼’라는 이름은 ‘게으른 사람(loafer)’에서 유래했다. 기존 로퍼에 디자인 요소가 더해진 페니 로퍼는 프레피 룩의 필수 아이템이자 근본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원조는 ‘G.H. BASS & Co.’의 ‘Weejuns’이다.
옥스포드 대학생들이 1페니를 로퍼 앞 스트랩에 넣는 것이 유행하면서 ‘페니 로퍼’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페니 로퍼를 자주 신는다면, 이름의 유래를 기억하며 동전 한번 넣어보자.

❹ 홀스빗 로퍼는 구찌
브라운 컬러 GG 로고 패턴, 배색 줄무늬. 구찌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진짜 구찌의 시그니처는 ‘홀스빗 로퍼’에 있다. 구찌의 시작은 승마였다. 구찌는 최상급 소재와 기술로 승마용 가죽 제품을 선보이며 럭셔리 승마 아이템으로 이름을 알렸다.

로퍼가 인기 있던 시절, 알도 구찌 역시 구찌만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있었다. 구찌는 말안장 장비의 금속 장식 ‘홀스빗’을 로퍼에 적용했다. 홀스빗은 가방, 벨트 등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며 구찌의 헤리티지를 구축했다.
홀스빗 로퍼 역시 수많은 브랜드에서 보여주는 제품군이다. 홀스빗 로퍼의 원조가 구찌라는 것을 알면, 알렉산드로 미켈레 이후 젊은 분위기와는 다른 구찌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❺ 역시, 내가 빠질 수 없지

아예 브랜드 이름이 아이템의 대명사된 대표적인 제품, ‘버버리 트렌치코트’다. 버버리 코트는 소재의 혁신을 일으켰던 방수 성능을 갖춘 개버딘 원단의 탄생과 함께한다.
토마스 버버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Trench) 환경에 적합한 코트를 디자인했다. 더블 브레스티드와 견장, D-링 벨트 등 군사적 요소들이 곳곳에 녹아 있는 디자인이 지금의 트렌치코트가 되었다.
트렌치코트는 버버리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로, 100년 역사를 훌쩍 넘은 근본이다.

라코스테의 폴로셔츠, 레이밴 선글라스, G.H BASS의 페니 로퍼. 가격도 저렴한데 역사까지 갖춘, 트렌드도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타임리스 아이템이다. 구찌, 버버리는 비싸더라도 한번 사면 평생이니, 장바구니를 다시 확인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