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은 젊고 부드럽고 명랑하며, 변덕스럽고 로맨틱하다. 때문일까, 달콤하지만 강렬한 핑크색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하나의 장치로 사용되곤 했다. 주인공의 일탈을 위해, 또는 주인공의 특별함을 위해. 그 빛나는 핑크 머리에 담아낸 의미를 파헤쳐 봤다. 우리의 가슴속에 사랑이라는 불을 지핀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부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까지.
*본 콘텐츠에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클로저>, <강철 수염과 게으른 동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탈의 핑크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광고 촬영차 도쿄를 방문한 영화배우 밥, 같은 호텔에 묵고 있는 샬롯의 만남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샬롯은 사진작가인 남편의 작업을 위해 함께 도쿄로 건너왔지만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며 단절을 느낀다. 밥도 마찬가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광고 촬영 현장과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로 가득한 낯선 도시에서 그는 외로움에 휩싸여간다. 잠들지 못하는 도쿄의 밤,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둘은 묘한 유대감을 쌓는다.
또 다른 밤. 여전히 동떨어져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식사를 하던 샬롯은 건너편에 앉아있던 밥을 발견한다. 일행을 뒤로하고 밥에게 다가간 샬롯. 그녀에게 밥은 “지금 이 감옥 같은 곳에서 탈옥해버릴까 고민 중이다”라고 밝힌다. 흔쾌히 동참한 샬롯은 밥과 함께 도쿄 시내를 배회한다. 핑크 머리가 등장하는 것은 둘이 노래방을 방문했을 때. 평소의 무난한 머리와는 정반대의 핑크 단발머리 가발을 착용한 샬롯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이 장면에서 핑크 머리의 의미는 바로 ‘일탈’이 아닐까.
아찔함의 핑크
삼각관계보다 위험한 사각관계를 다룬 영화 <클로저>. 소설가가 꿈인 댄, 뉴욕 출신 스트립 댄서 앨리스, 사진작가 안나 그리고 의사인 래리까지. 이 네 명의 주인공 사이를 복잡하게 오가는 애정의 화살은 극의 긴장도를 높인다. 핑크 머리의 등장은 연인인 댄이 안나와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앨리스가 잠적한 뒤에 등장한다. 안나와 헤어진 래리가 찾은 클럽에서 핑크 머리 가발을 쓰고 등장한 스트리퍼 앨리스. 댄을 완전히 잊은 듯, 아찔하게 춤추는 앨리스의 모습은 더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오묘한 슬픔을 안겨준다.
이 작품에서는 스트리퍼인 앨리스의 모습과 대비되는 평소 그녀의 모습들도 주목하길 바란다. 영화를 시청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린 명대사들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
“사랑이 어디 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비슷한 말들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 말들은 공허할 뿐이야.” – <클로저>에서 앨리스의 대사 중 일부
발랄함의 핑크
사실 필자의 가슴속에는 영원한 단 한 명의 핑크 머리가 있다. 2004년부터 EBS에서 방영했던 어린이 프로그램, <강철 수염과 게으른 동네>의 주인공 스테파니다. 팔찌, 가방, 원피스, 머리까지 온통 핑크색으로 물들인 광기의 주인공은 그때 그 시절, 어린이들의 반찬 투정을 고쳐놓은 장본인. 마을 어린이들에게 불량 식품을 먹지 말라고 권유하며 건강한 식단, 꾸준한 운동을 하게끔 조장하던 그녀 덕에 엄마들의 일거리는 둘이나 덜어진 셈이다.
또, 비행선을 타고 등장하는 스포르타는 설탕을 먹으면 힘을 잃고, 건강한 과일과 야채를 먹으면 힘을 얻는다는 설정까지 갖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색으로 무장한 그녀가 스포르타와 함께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었을 당시의 어린이들. <강철 수염과 게으른 동네> 보고 자란 독자라면 필자처럼 ‘핑크 머리 = 스테파니’ 공식을 갖고 있을 터. 극 중에 몇 없는 인간 사람 캐릭터인 만큼,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그녀였지만 머리 위에 더해진 핑크색은 그녀를 더욱 독보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