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그간의 필모그래피에서 분명한 변곡점을 드러낸다. 코미디적인 요소가 더욱 짙어진 이번 영화는 감독이 20년간 응축해온 집념과 시대적 고민이 함께 엮인 결과물이다. 그중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지점은 정서경 작가의 부재였다.

익숙한 이름이 크레딧에서 사라졌다
2005년작 <친절한 금자씨>를 시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단편작들과 미국 제작 영화 <스토커>를 제외한 모든 작품은 정서경 작가가 집필에 함께 했다. 이는 특유의 동화적인 아름다움과 기묘한 서사를 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둥이었다.

대신 이번 작품에서는 이경미 감독, 이자혜 작가가 각본 집필에 합류하며 새로운 ‘박찬욱 사단’이 꾸려졌다. 그 결과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색채가 한층 짙어졌고, 박찬욱 감독 필모그래피의 또 다른 국면을 제시했다. 정서경 작가의 부재가 만들어낸 변화 자체가 이번 작품의 관람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다.

<헤어질 결심>은 안개, <어쩔수가없다>는?
서래라는 인물의 모호함, 그 속에서 눈을 뜨려는 해준, 그리고 안개 자욱한 소도시 이포의 정서를 응축하기 위해 사용된 정훈희의 ‘안개’. <헤어질 결심>이 안개를 중심축으로 삼아 극을 이끌어갔다면, <어쩔수가없다>는 1980년대 가요로 시선을 돌렸다.
70년대의 ‘안개’가 서사 전체를 감싸는 메타포였다면 이번에는 80년대 가요를 조각조각 배치해 일상의 질감을 살려냈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와 김창완의 ‘그래 걷자’, 배따라기의 ‘불 좀 켜주세요’는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등장인물에게 친근감을 부여한다.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공기를 형성하는 장치인 셈이다. 스크린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극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대사 없이 감정을 설명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대중가요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극의 정서를 지탱하는 방식으로, 영화는 현실과 호흡하고 있다.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가다 보면 극중 인물들의 마음에 한층 더 가까워지게 될 것.

20년간 준비했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집념이 응축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경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스토커> 제작 전부터 각본을 공동 집필하기 시작해 무려 16년 만에 그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리처드 스타크의 원작 소설 <액스>를 영화화하려던 감독은 제작을 추진하던 중 이미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 작품이 바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2005년작 <액스, 취업에 관한 안내서>였다.
포기를 모르는 박찬욱 감독은 <박쥐>로 칸영화제에 참석해 가브라스 감독에게 리메이크 허락을 구했다. 리메이크 생각은 없었는데 무려 ‘박찬욱’이니 오케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난항은 계속되었다. 애초부터 미국 제작을 추진했으나,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본 미셸 가브라스 부인이 한국에서 제작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미국 영화 제작에 대한 결정을 굽히고 싶지 않았기에 거절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을 연출할 때쯤 그 마음이 바뀌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완성한 박찬욱 감독은 파리에서 극장을 빌려 가브라스 가족들과 시사회를 진행했다.
“이 작품은 이렇게 만들어졌어야 했고, 이 길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 미셸 가브라스

그렇다면 왜 감독은 이 작품에 20년이라는 시간을 쏟았을까. 그 이유는 원작이 지닌 ‘보편성’에 있다. 1990년대에 발표된 소설 <액스>는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의 현실과도 겹쳐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라는 소재는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사회적 문제이자 갈등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박 감독은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이 이야기를 선택했다.

어쩔 수가 없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무심하게 내뱉는 말인가. 감독은 띄어쓰기를 지워버린 채 하나의 덩어리로 제시한다. 문법적 간격이 사라진 순간, 익숙한 문장이 낯설게 보이는 지점에서 우리는 말의 무게를 새삼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