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단어는 문자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마음으로 어렴풋이 그 의미를 전달한다. ‘가족’ 역시 그런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각자가 떠올리는 가족은 각기 다른 형태의 이미지와 의미를 띠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전에서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까?
가족 :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국가에서 법적으로 인정 받은 구성원만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사전적 정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식구(食口)에 더 가깝고 그래서 정이 있고 애틋하며 때로는 지겹기도 한 존재다.
근래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인식하는 가족은 사전적 정의와 더 가깝다. 그런데 여기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는 일본의 영화감독이 있다.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방식의 가족, ‘대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느 가족> 2018

어머니의 연금과 도둑질 한 물건으로 간신히 생활하지만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시바타 가족. 아들 쇼타와 아버지 오사무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 부모에게 방치된 채 떨고 있는 아이 유리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유리를 집으로 데려간 둘. 아내인 노부요는 유리를 보고 곧장 집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노부요의 마음을 뒤집은 건 돌려보내려 찾아간 유리의 집 앞에서 들려온 친모의 목소리.
“나도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냐!”
노부요는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며,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한다. 그러던 어느날, 쇼타와 린은 도둑질하다 그만 주인에게 붙잡히고 만다. 쇼타는 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대신 경찰에 끌려가는데, 이를 계기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각자 품고 있던 비밀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작품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한 가족을 소재로 기존의 전통적인 가족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제시해 그 의미를 재고하게 하는 작품이다.
서로를 선택한 그들

선택받은 건가, 우리가?
보통은 부모를 선택할 순 없으니까.
근데, 스스로 선택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겠어?
뭐가 강해?
그러니까, 유대… 정 같은 거.
나도 널 선택했지.
– <어느 가족>
본래 가족의 의미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지는 것이다. 이들은 혈연이 아니기에 가족이 될 어떤 의무도 강제성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선택했다. 그 바탕엔 피와 법이 정해준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다. 남편의 외도로 혼자 남겨진 집주인 할머니 하츠에, 바람난 남편의 손녀 사야카, 폭력을 일삼는 전 남편을 죽인 노부요와 오사무, 마트 주차장에서 유괴한 아들 쇼타, 그리고 친부모에게 방치된 유리.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보듬으며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영화 속 누구도 이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런 게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그건 알지만 피가 안 섞여서 좋은 점도 있잖아.
쓸데없는 기대 안 해도 되는 건 좋지.
– <어느 가족>
가족이란 무엇인가?

경찰에 붙잡힌 쇼타와 하츠에의 죽음, 게다가 린의 유괴범으로 몰려 검거된 시바타 가족. 조사관은 노부요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해요.”
그러자 노부요가 답한다.
“엄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죠. 낳으면 다 엄마가 됩니까?”
영화는 이 한 대사로 관객에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수많은 폭행과 폭언을 허용했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가정폭력을 사회 문제로 인식하긴 했으나 여전히 산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아동 유기 및 폭행, 10대 청소년의 가출, 성폭력과 살인까지 뉴스를 통해 수면 위로 올라온 사건만 해도 셀 수 없다. 그렇다면 수면 아래의 현실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단지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이유로 이루어진 가족은 더는 안전한 사회 그물망이 아니다. 오히려 빨리 벗어나야 할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아이는 의식주를 제공해 줄 부모를 잃을 수 있고 가정주부는 금전적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사회는 혈연 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사회 복지 서비스도 누릴 수 없으며 법의 보호조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낳으면 다 엄마가 되냐는 노부요의 말에 조사관은 답한다.
“하지만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죠.”
<어느 가족>은 진짜가 아닌 가짜 가족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게되는 역설로, 기존의 관념을 부수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2013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똑똑한 아들과 함께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료타.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에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6년간 키운 아들 케이타가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 병원에서 바뀐 아이였다는 것. 병원 측의 제안으로 료타는 아내 미도리와 함께 친자 가족을 만나러 가게 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혈연으로 이어진 자식 ‘류세이’를 택할지 아니면 6년 동안 친자식처럼 키워온 ‘케이타’를 택할지.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작품은 가족이 혈육으로만 구성된다는 기존의 개념에 의문을 가지고, 깊은 유대감으로 이어진 관계 역시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와 닮지 않은 너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 ‘역시 그랬군.’ 역시라니… 역시란 건 무슨 뜻이야?
당신은… 애가 당신처럼 우수하지 못한 게 이상했던 거야. 그 한마디는 평생 잊을 수 없어.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료타는 가족보다 일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아들 케이타와 잘 놀아주는 편도 아니었고, 그와 친근한 관계를 쌓아가기보단 자신처럼 강하고 똑똑한 엘리트로 키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케이타는 료타처럼 경쟁심이나 욕심이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보단 느긋한 편에 속했고 료타는 이점을 석연치 않아 했다. 그런데 케이타가 자기 아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자, 료타는 말한다.
“역시 그랬었군.”
극 초반, 료타는 케이타의 사립 초등학교 입학 면접에서도 아이의 장점과 단점이 모두 엄마를 닮았다고 말한 적 있었다. 그는 이미 케이타가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닮은 너

친자의 아버지였던 유다이는 료타와 모든 면에서 반대이다. 그는 시골 동네에서 전파상을 운영하고,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격인 데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는 다정한 아버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류세이지만,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걸까? 강한 자존심과 불타는 승부욕은 료타를 꼭 빼닮았다. 료타는 류세이가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그들과 헤어지게 되고 금방 적응할 것이라 생각했다.
닮지 않은 널 사랑할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 두면 안 될까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앞으로 점점… 케이타는 사이키 씨 가족을 닮아 가겠죠. 반대로 류세이는 점점 우릴 닮을 테고. 그런데도 피가 연결돼 있지 않은 아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어요?
당연히 사랑할 수 있죠. 닮았니 안 닮았니, 그런데 집착하는 건 아이랑 연결돼 있는 느낌이 없는 남자뿐이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괴로워질 거예요. 우리도. 아이들도.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들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던 료타와 유다이네 가족들. 료타는 오랜 고민 끝 6년을 함께한 케이타가 아닌 친자 류세이를 선택한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부모였던 사람들을 떠나게 된 케이타와 류세이. 각자 불안하고 불편한 시간을 보내던 중, 특히 친구 같던 아버지와 살던 류세이는 료타의 강압적인 훈육 방식에 점점 삐뚤어지게 된다.
결국 료타에게 쌓인 불만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못 이기고 예전 집으로 가출을 감행한 류세이. 료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류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직장에만 할애했던 시간을 아이에게 쏟아붓기 시작한다. 그런데 류세이와 가까워질수록 료타는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받는다. 우연히 류세이를 찍은 사진을 보던 중, 케이타가 찍은 자신의 사진들을 발견하게 료타. 그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진다. 행복하게 웃는 류세이와 자신의 사진 뒤, 케이타가 찍은 자기의 모습은 고작 뒷모습이거나 피곤함에 절어 잠든 모습뿐이다.
곧바로 케이타를 찾아가는 료타. 그러나 이미 상처받은 케이타는 그를 피해 도망친다. 서로 다른 두 갈림길을 뛰어가는 두 사람. 케이타가 말한다.
“아빠는 아빠가 아니야.”
그러자 료타가 말한다.
“그래도 6년간은 내가 아빠였어. 제대로 해주진 못했어도 아빠였다고.”
두 갈림길이 하나로 이어지고 그들은 다시 서로를 마주한다. 료타는 케이타를 꼭 껴안는다. 그렇게 그들은 피가 이어준 가족이 아닌, 함께한 시간이 이어준 가족의 곁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혈연이 정해준 아버지가 아닌 존재론적인 아버지에 대해 질문한다. 료타가 겪어온 일련의 사건들은 단지 피로 맺어진 인연만이 부자 관계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로, 아이가 생기면서 자신이 어떤 과정을 통해 ‘아빠’라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시작하게 된 작품이라 전하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가족의 정의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임과 동시에 가장 멀기도 한 존재이다. 가까이 있기에 서로를 다 안다고 착각하기 쉽고 그래서 더는 알려 하지 않는다. 거기서 관계가 멀어진다. 신체적 거리만 가까운 채로. 지금까지 살펴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두 영화 <어느 가족>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이 둘에 공통점은 ‘혈육’이 중심 키워드라는 것이다. 두 영화는 말한다. ‘혈육’은 가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포함될 수 있으나 가족을 정의하지 못한다고.
두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없다>, <브로커> 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의 시선이 담긴 명작이 많다. 가족에 대한 질문을 건네받고, 스스로 정의해 보고 싶은 독자라면 꼭 한 번 감상해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