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우리는 패션의 미래를 봤다 커버이미지
fashion

세기말, 우리는 패션의 미래를 봤다

20471120, 세기말의 유령들

URL 링크가 복사되었습니다. 공유해보세요!

1980년대 유럽에서는 ‘앤트워프 식스’가 등장해 아방가르드 패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언더커버, 히스테릭 글래머, 뷰티 비스트, 크리스토퍼 네메스와 같은 실험적인 브랜드들이 패션 씬을 이끌고 있었다.

도쿄 중심부가 여전히 하이엔드 패션 하우스를 좇던 시기, 하라주쿠 골목 어귀의 청춘들은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서브컬처를 조합해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냈다. 브랜드보다는 태도가, 유행보다는 개성이 중요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하라주쿠 뒷골목에서 ‘우라하라’ 패션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20471120이 탄생했다.

그래픽을 전공한 나카가와 마사히로와 패션을 전공한 아제치 리카는 1992년, ‘Bellissima’라는 이름으로 브랜드를 설립했다. 그리고 2년 후 브랜드명을 지금의 여덟 자리 숫자로 바꾸었다. 언뜻 세기말과 어울리지 않는 숫자 같지만, 그 속에는 반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2047년 11월 20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인생과 영원히 빛날 추억에 건배하는 꿈을 꿨습니다.”

종말의 이미지와 혼란이 가득했던 세기말, 이들이 상상한 미래는 개개인의 다채로운 개성이 중심이 되는 시대였다. 기술과 개인주의가 급속도로 발달한 시대 속, 과감한 표현과 자유로운 태도가 중심이 될 패션의 미래를 본 것이었다.

그들의 옷은 시대의 종언에 반하는 상상력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실험적인 실루엣과 레이어링, 과장된 디테일. 전형을 거부하는 이들의 태도는 하라주쿠 청춘들의 자의식을 대변했다.

나카가와 마사히로는 특히 어린 시절 즐겨봤던 일본 특촬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98S/S 컬렉션 ‘YIKES’에는 브랜드의 실험정신이 가득하다. 1997년 11월 20일, 헬리콥터 한 대가 런웨이 아래 착륙했다. 그리고 롤러스케이트를 탄 모델들이 헬기에서 내려 런웨이를 가로지르며 쇼가 시작됐다.

이윽고 외발자전거와 미니 바이크를 탄 모델들이 줄지어 런웨이에 등장했다. 피에로 분장을 한 이들과 수트를 입은 이들이 함께 나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위태롭지만 자유로운 이들의 쇼는 일종의 퍼포먼스와도 같았다.

그 정신과 감각은 공간까지 이어졌다. 매장 인테리어는 퓨처리즘을 반영해 화이트와 실버가 주를 이루었고, 관람차와 롤러코스터를 연상케 하는 디스플레이 구조가 더해졌다.

또한 두 디자이너의 절친한 친구였던 가구 디자이너, 노부유키 요시모토가 20471120을 위해 제작한 커스텀 체어가 함께 했다. 미래적인 인테리어와 유년의 기억, 놀이 기구의 곡선이 뒤섞여 브랜드의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버블 경제가 무너진 뒤, 일본에서는 패스트패션이 패션 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생산과 소비는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른 낭비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수요가 있으면 그에 맞는 공급이 따르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도쿄에는 공급이 너무 많다.”

나카가와 마사히로는 이와 같은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도쿄 리사이클링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패션과 예술계 인물들로부터 추억이 담긴 헌옷을 기증받아, 이를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컬렉션이었다.

반소비주의 운동을 펼쳤던 그는 이 프로젝트를 자신의 독립적인 프로젝트로 여겼다. 결국 20471120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하라주쿠 거리에서 시작된 그들의 실험은 2047년을 보지 못한 채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나카가와 마사히로와 리카가 바라본 미래는 여전히 유효하다. 세기말의 유령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옷장 속 어딘가에 살아 있으니 말이다.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