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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이, 홋카이도에 갈까요

함박눈 내리는 일본의 풍경에는 묘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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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함박눈 내리는 일본의 풍경에는 묘한 힘이 있다. 창문 너머로 조용히 내려앉는 눈발은 도시의 소음을 삼키고 마을의 윤곽을 흐릿하게 지운다. 그 속에서 잠시 고립된 우리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설렘에 휩싸인다. 일본의 겨울이 가진 특유의 매력은 바로 이런 모순에서 시작된다.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 눈더미 사이로 흔적만 남긴 주택들, 그리고 외로이 역을 빠져나가는 열차까지. 모든 장면이 이미 한 편의 영화처럼 완성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질 때면 자연스레 홋카이도가 떠오른다. 추위도, 바람의 세기도, 시간의 흐름도 잊게 만드는 흰 풍경.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현실을 내려놓고 자연이 만들어낸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런 이유로 많은 영화감독들이 홋카이도를 스크린 속 배경으로 선택해왔다.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는 인물들의 감정, 눈에 파묻힌 거리 위로 희미하게 흔들리는 빛, 그리고 대사 한 마디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침묵. 홋카이도는 그런 서사들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적합한 배경이다. 쓸쓸함과 따뜻함, 멈춤과 흐름, 고립과 자유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올겨울, 잠시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다면 스크린 너머의 홋카이도를 거닐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1995

사랑했던 연인 후지이 이츠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약혼녀였던 와타나베 히로코는 2년이 넘도록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다. 추모식 날, 히로코는 그의 졸업 앨범에서 이제는 사라진 그의 어린 시절 집 주소를 발견한다. 그리운 마음에 안부를 묻는 편지를 띄우는 히로코. 그런데 며칠 뒤,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으로 답장이 돌아온다.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

<러브레터>를 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하얀 설산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장면은 알 테다. 더욱이 이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타루의 겨울이 자꾸만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겨울은 늘 후지이 이츠키와 함께 했으니.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홋카이도, 시간 틈 사이로 오가는 편지들, 그리고 두 명의 후지이 이츠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어린 시절 말로 다 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카메라에 포착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8년작 <4월 이야기>의 주인공 우지키의 고향 역시 홋카이도이니, 이곳을 떠나 도쿄로 향하는 순간을 담은 해당 영화도 함께 감상하길 바란다.

후루하타 야스오 <철도원>, 1999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을 원작 <철도원>. 하얀 눈으로 뒤덮인 시골 마을의 종착역, 호로마이를 지켜온 철도원 ‘오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역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지만 오토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딸과 아내의 마지막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한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해 영화는 현실이 되었다. 호로마이역의 실제 배경이었던 홋카이도의 이쿠토라역이 폐쇄 소식을 알렸다. 117년을 달려온 JR네무로선이 폐선됨에 따라 이곳도 운영을 중단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영화 팬들이 이곳에 방문하고 있고, 영화 <철도원>의 영화 전시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년 1월 7일, 국내 극장에서 다시 한번 <철도원>을 스크린에서 감상할 기회가 찾아온다. 최초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10년 만에 돌아올 예정이니, 극장 스크린에서 이들을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

“기차나 사람이나, 오래되면 추억이 되는 거야.”

허우 샤오시엔 <밀레니엄 맘보>, 2001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밀레니엄 맘보>는 타이베이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방황하는 젊은 여성, 비키를 그린다. 화려한 불빛 아래 스미는 공허함, 그래서인지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대만의 밤. 비키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흐릿해진 자신의 삶을 내레이션으로 더듬는다. 그녀는 하오하오와 헤어졌지만 그는 늘 그녀를 찾아냈다.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늘 돌아왔고 스스로 다짐했다. 은행에 있는 50만 대만 달러를 전부 써 버리면 그를 영영 떠날 거라고. 

“넌 네 세계에서 내 세계로 왔어. 그러니 내 세계를 이해 못 하는 거야.”

임대형 <윤희에게>, 2019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 편지는 윤희가 아닌 그녀의 딸 새봄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오타루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그렇게 함께 떠난 여행, 윤희는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떠난다.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잠시 멈추고, 잠시 잊고,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어쩌면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그런 여백을 만들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 그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청되어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게 된다. 새로운 곳에서 만난 드라이버 미사키 역시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 덮인 홋카이도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본다.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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