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프림, 스투시, 팔라스. 이름만 들어도 거리 느낌 물씬 나는 스트릿 브랜드다. 힙합 혹은 스케이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세 브랜드. 그리고 ‘패션에 관심이 있다’하는 사람은 반가워할 얼굴을 가진 브랜드가 하나 더 있다. 래퍼들이 입은 모습을 보고 주야장천 따라 샀던 추억의 ‘오베이(OBEY)’가 바로 그 주인공.
오베이를 이끄는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는 꽤나 괴짜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의 브랜드 로고에 걸린 이 사람은 본인과는 연관이 하나도 없는 인기 프로 레슬러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얼굴이다.

그는 어쩌다 인기 프로 레슬러의 얼굴 밑에 ‘복종하다’라는 뜻의 ‘OBEY’를 붙여서 브랜드 로고를 만들게 됐을까?
금수저가 재미없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셰퍼드 페어리. 그의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부동산 업자였다. 엘리트 집안의 자식이어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철학, 인문학 책을 즐겼다. 조금씩 커가면서 또래 친구들과 별다를 것 없이 스케이트보드와 음악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그림에 재능이 있었는지 친구들의 스케이트보드에 종종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지능과 재능을 모두 갖추며 천재의 낌새를 보였다.

모난 곳 없이 자란 탓일까, 대학 진학을 앞두고 소수가 세계를 움직인다는 내용의 B급 영화 <화성인 지구 정복>을 보고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길거리에 덕지덕지 붙은 그의 스티커
셰퍼드 페어리는 친구들의 스케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영화를 보고 자신도 미술에 하고 싶은 말을 담기로 결심한 그는 미술계 하버드 대학으로 불리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 진학했다.

실행력 좋았던 그는 바로 길거리에 뛰어들었다. 신문에서 본 당시 인기 프로 레슬러였던 ‘앙드레 더 자이언트’의 얼굴. 생각이 번뜩 떠올랐는지, 그의 얼굴을 본떠 만든 스티커를 유명 관광지 근처에 덕지덕지 붙인 것이다. 도통 왜 붙였는지 알 수 없는 장난스러운 그의 행동에 사람들은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 자신의 학교와 지역 너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며 유명해졌다.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 노출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환경을 되돌아보며 무엇에 따르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스티커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에 복종하고 있는가?
앙드레 더 자이언트 스티커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셰퍼드 페어리. 우스꽝스러운 스티커 덕분에 초상권 침해로 연락이 왔다. 멈출 줄 알았던 그는 아예 ‘오베이 자이언트’라는 예술 레이블을 만들게 된다. 얼굴을 도식화하여 밑에 ‘OBEY’라는 글자를 붙여 만든 로고가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오베이의 로고다.

또 미국에서 금지하고 있던 그래피티와 그의 현상학 실험이 담긴 ‘Andre the giant has a Posse’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어 길거리의 거장 반열에 오르게 된다.
물론 돈도 벌게 됐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밴드 ‘레드 제플린’, ‘스매싱 펌킨스’ 등의 앨범 커버도 만들었고, 자신의 작품으로 전시도 연다. 오죽하면 진짜 거장 키스 해링과 앤디 워홀을 그와 비교했겠는가.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
‘OBEY’는 ‘순종하다’, ‘따르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OBEY’라는 단어를 붙인 이유는 ‘어떠한 세력에도 복종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이 ‘셰퍼드 페어리’라는 이름에 팔려나가게 되니, 아이러니함에 빠졌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베이 클로딩’을 세웠다.

오바마의 눈에 들어온 그래피티

한창 베트남 전쟁을 하던 당시, 그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을 건물 벽 곳곳에 그렸다. 아무래도 정치적인 그림을 건물에 냅다 그려대니, 기물파손죄로 고소를 당하는 일도 잦았다. 조금씩 지쳐가던 그때, 새로운 기회가 셰퍼드에게 다가왔다. 바로 2008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의 선전 포스터를 제작하게 된 것.

거리에 자극적인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대선 포스터를 맡긴 캠프도 대단하지만,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의 대선 포스터를 러시아 선전물처럼 그린 셰퍼드의 깡도 대단하다.
아무튼, 스투시가 들어서 있던 점포를 오베이가 꿰찰 정도로 그의 위상은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스트릿계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남아공에 본국 평화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 벽화를 그리고, 트럼프의 인종차별 발언을 지탄하는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오베이 레코드를 통해 루키들을 꾸준히 지원해 주고 있는 셰퍼드 페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는 사회에 재능을 환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