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밀레니엄 맘보>는 타이베이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방황하는 젊은 여성, 비키를 그린다. 화려한 불빛 아래 스미는 공허함, 그래서인지 쓸쓸하게만 느껴지는 대만의 밤. 비키는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흐릿해진 자신의 삶을 내레이션으로 더듬는다. 그런데 어쩐지, 비키의 삶은 그를 연기한 배우 서기와도 닮아있다.

10대 서기의 곁에는 늘 술과 담배가 함께였다. 결국 15살에 집을 나온 그녀는 타이베이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하며 포르노 잡지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배우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단순하고도 절박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녀는 훗날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말했다.
“철이 없었다. 10대의 나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에로 배우 서기에게 돌아오는 건 비난과 조롱뿐이었다. 19세에 홍콩으로 건너갔으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곳은 여전히 성인 잡지나 포르노 영화뿐이었다.

첫 번째 전환점은 1996년에 찾아왔다. 당대 톱스타였던 장국영, 막문위와 함께 <색정남녀>에 출연하게 된 것. 포르노 배우 역으로 출연하긴 했지만 이 작품은 ‘에로’라는 꼬리표를 떼고 ‘배우 서기’로 거듭나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연기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을 만나다
“현실적인 공간과 그에 따른 스토리가 있다면, 배우는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고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가 가능해진다.”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감독 허우 샤오시엔이 오래도록 고수해온 철학이다. 그는 <밀레니엄 맘보>를 준비하며 몇 달간 타이베이의 클럽과 바를 드나들었다. 젊은이들의 삶과 속도, 그 공기를 직접 체감하고자 했다.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는 영화가 아닌, 지금의 청춘을 담고 싶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등장인물들과의 나이 차를 실감하며 그들의 리듬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그러한 맥락에서 선택한 것이 바로 서기였다. 허우 감독은 그녀라면 현재의 삶을, 도시의 질감을, 그리고 불안정한 정서를 온몸으로 표현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처음부터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기가 감정의 폭을 충분히 탐색할 수 있을지, 예술적 표현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는데, 이전까지의 홍콩, 대만 배우들이 대체로 수동적인 연기 스타일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촬영이 끝날 무렵, 허우 감독은 ‘진정한 스타를 만났다’고 말하며 서기를 인정했다.

서기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연기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회고한다.
“이전에는 너무 많은 역할과 페르소나를 연기하다 보니 더 이상 내어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함께 작업하며 모든 게 달라졌다. 연기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대신 캐릭터가 내 안에 자리 잡도록 하는 법을 배웠다.”
실제로 <밀레니엄 맘보>는 시나리오조차 없이, 500자 미만의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서기는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비키가 되어갔다.
그 후 서기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뮤즈로 자리 잡았다. 시대를 넘나들며 각기 다른 인물을 연기했지만, 그녀를 감싸는 공기엔 늘 비슷한 쓸쓸함이 맴돌았다. 자신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깊이 체득한 것이다.

서기는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안에서 캐릭터를 단순히 연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정의해나갔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과거들과 수많은 시선을 지나며 그녀는 조금씩 자기만의 결을 만들어갔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카메라가 비춘 것은 결국 ‘비키’라는 인물이 아니라, 서기라는 사람 자체였다. 시대와 도시, 그리고 쓸쓸함을 품은 배우, 서기. 그렇게 그녀는 자신만의 결을 지닌 배우로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