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일대를 가득 메운 10월의 보랏빛 플래그는 ‘#Burberrystreet’의 일환. 2023년 버버리의 F/W 컬렉션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거둔 ‘다니엘 리’는 로고를 다시 세리프로 회귀시키며 젊은 디렉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민한 사업가적 전략과 함께 성숙하고도 캐주얼한 감성의 디자인으로 패션 하우스의 성공 가도를 서포트하는 그. 럭셔리 하우스에서 젊은 감각의 디렉터를 뽑자면, 단연코 다니엘을 연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연립방정식은 10년을 넘어 현재 진행형이다.
다니엘 리, ‘셀리니세이션’에 합류하다
2011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고 메종 마르지엘라와 발렌시아가를 거쳐 도나 카란으로 거취를 잡은 그. 당대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여성복의 아이콘이었던, ‘피비 파일로’는 디자이너라면 함께 일하고 싶은 우상적 존재였다. 참고로 피비와 다니엘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동문 지간으로, 다니엘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과 풍부한 경력은 피비의 안목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피비의 디자인 팀에 합류하게 된 그는 셀린느를 여성복의 정점에 올라서게 만들게 되는데, 그러던 중 모회사인 ‘LVMH’가 셀린느의 사업을 대폭 확장시키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회사와의 지속적인 마찰을 빚었던 피비는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자리에서 사임하게 된다. 그에 맞춰 퍼졌던 소문은 셀린느의 디자인팀에서 다음가는 ‘다니엘 리’가 디렉터를 맡게 된다는 것.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을 감내하는 것처럼, 동시에 셀린느를 나와 일본에서의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뉴 보테가 베네타의 시대
당시 다니엘을 찾아간 것은 셀린느의 모회사인 LVMH의 라이벌, ‘케링’의 회장, 앙리 피노. 그와의 만남에서 다니엘은 그룹의 애물단지였던 ‘보테가 베네타’에 대한 간담을 나누게 된다. 전임자 토마스 마이어가 이끌던 보테가는 스트리트의 물결에 탑승한 패션 하우스들 사이에서 이렇다 할 이슈를 보이지 못했던 터. 더불어 ‘장인 정신’이라는 막중한 틀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류임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을 보테가의 디렉터로 임명하기엔 관계자들에게도 일종의 모험이었다.무명 디자이너에 가까운 그를 클래식의 본고장으로 끌어들이기는, 일종의 ‘공포 체험’과 가까운 시도. 하지만 앙리 피노의 모험은 대성공을 기록하게 된다. 다니엘은 보테가의 새로운 시그니처를 탄생시키는데, 이름하여 ‘만두 백’의 대형 파우치. 리한나와 카일리 제너 등 내로라하는 셀럽들의 샤라웃과 함께,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원하는 제품’으로 선정된다. 그와 더불어 보테가의 효자가 되어버린 ‘카세트 백’. 기존의 인트레치아토 공법의 방향을 틀고 소재와 크기의 변형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다니엘은 인스타그램을 지워버려
보테가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다니엘은 이윽고 가장 흔하고 유명한 마케팅이었던 ‘인스타그램’을 폭파시키게 된다. 이러한 시도를 펼친 건 패션계에서는 꽤나 놀라운 화제. 이를 두고 다니엘은 ‘with a human touch’, 그들의 회장은 ‘It’s merely using them differently’라는 말을 남기게 된다. 이미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다니엘의 휘호 하에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보테가의 전략은 소비자들과의 메커니즘을 뒤바꾸는 것. 자체적으로 계간하던 디지털 매거진, <Issue>를 메인으로 소통하기 시작한 보테가는 특유의 캠페인 포스터로 인지도를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에게도 하나의 변곡점이 생기게 된다. 기존 보테가를 주름잡던 아틀리에 크루들과의 껄끄럽던 소통 방식, 잦은 야근이 조직 내에 일그러짐을 가져다준 것. 이윽고 디트로이트에서 선보이게 된 ‘Salon 03’ 컬렉션은 다니엘이 사임을 하게 된 마침표를 장식하게 된다. 애프터 파티와 관련한 갈등이 빚어지며 회사 측과 소통이 일절 두절된 것. ‘다니엘의 공로를 매우 높게 산다’라며 남겼던 보테가의 공식 입장이었지만, 이는 차세대 디렉터를 위한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었을까. 그를 응원하는 뉘앙스를 펼치던 보테가는, 그렇게 다니엘과의 이별을 맞이하고 새로운 디렉터와의 페이지를 써 내려간다.
베이지 버버리 NO, 퍼플 버버리 YES
보테가와 다니엘이 환상의 조합이라고 평가하던 패션계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몇십 년의 역사에 헤매던 보테가를 짧은 시간에 메인 스트림으로 올려놓은 것에 비해 갑작스러운 이별이 아닐 수 없던 것. 동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다니엘의 차기 행보였는데, 일각에서는 LVMH와 손을 잡은 피비가 독자적인 브랜드를 론칭하며 그에 합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복귀는 바로 ‘버버리’. 리브랜딩의 귀재로 한차례 신화를 보인 그가 버버리라는 ‘160년 전통’을 다시 한번 일으켜야 했던 것인데, 그가 선택한 방법은 ‘프로섬’의 귀환이다.전통적인 수공예로 상위의 프로섬 라인을 버버리의 본진으로 끌어들였지만, 보테가에서의 다채로운 컬러 매치로 보였던 그의 과거가 연상되던 전략이었다. 레드와 옐로우, 퍼플의 조합은 현재까지 버버리에서 볼 수 없었던 과감한 팔레트. 보테가에서 그린을 키 컬러로 차용했던 것처럼, 다니엘만의 독특한 브랜딩은 버버리를 신선한 패션 하우스의 이미지로 가져다 놓은 것이다. 더불어, 세계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버버리 스트리트’ 캠페인 또한 보테가에서 펼치던 포스터 캠페인과 인스타그램의 폭파가 연상되는 것은 마찬가지.
건물 외벽과 곳곳에 위치한 플래그가 보는 이로 하여금 버버리의 이미지가 무의식의 연장선 상에 놓이게 되는 것. 영국의 국화인 ‘장미’를 프린팅으로 사용하지만, 결코 브리티시 감성을 ‘오래된 것’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그린이 보테가의 것임을 탄생시킨 다니엘이 새롭게 만든 버버리 블루. 버버리와 함께 할 다니엘만의 ‘젊음’을 응원하며, 그의 똑똑하지만 아름다운 컬렉션인 다음 ‘버버리 블루’는 무엇일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