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대 시절, 교복 위에 걸쳐 입던 하나의 상징 같은 브랜드가 있었다. 이름하여 ‘아베크롬비’. 줄여서 ‘아베’라고도 불렀던 이 브랜드는 당시 또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입었고, 친구끼리 서로 바꿔 입는 유행까지 번졌다. 그때 그 시절, 10대들의 비공식 유니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아베크롬비가 어느 순간 그림자도 보이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 유행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아베크롬비는 그것과 조금 다른 결을 보였다. 10대를 타깃으로 대흥행을 거뒀던 한 브랜드의 인기와 몰락,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유행의 시작

1892년, ‘아베크롬비&피치(Abercrombie & Fitch)’는 본래 아웃도어 브랜드로 출발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스포츠웨어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 그러다 1988년, ‘마이크 제프리스’가 CEO로 부임하며 브랜드의 방향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그는 10~20대를 겨냥한 캐주얼 브랜드로 사업 전략을 펼쳤다. 오직 백인으로만 구성된 미남/미녀 모델, 상의 탈의 광고, 노출 중심의 비주얼 전략을 내세웠고, 시그니처 자수 로고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며 말 그대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2010년대 들어서며 그 영향이 한국에도 전해졌다. 한국 해외 직구의 인기를 실감한 아베크롬비는 2013년, 대한민국까지 진출에 나섰다.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당시 길에서 흔히 보였을 정도로 10대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반응과 지지를 얻게 된다.
몰락의 서막

승승장구만 할 것 같던 아베크롬비의 위기는 이미 조금씩 찾아오고 있었다. 백인을 위한 확고한 브랜딩과 마케팅이 화를 불러온 것. 인종차별은 물론, ‘날씬하고 아름다운 사람만 쇼핑하기를 원한다’, ‘뚱뚱한 사람을 위한 공간은 없다’ 와 같은 CEO의 발언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광고와 매장에는 백인만 등장했고, 가장 큰 사이즈가 L이었을 정도로 다양성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 밖에도 잡음이 끊이질 않던 아베크롬비는 국제적인 조롱과 함께 기존 소비자들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차별적인 브랜드 철학은 판매 거부 움직임을 불러일으켰고, 매출은 급감했다. 2016년엔 ‘미국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브랜드’로 선정될 정도. 국내도 마찬가지였다. 2017년 1월, 호기롭게 내세웠던 서울 매장은 임대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2025년

모든 게 끝난 듯했던 브랜드가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4년, 마이크 제프리스가 사임하고 2017년 ‘프랜 호로비츠’가 새로운 CEO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뒤엎기 시작했다.
기존의 디자인은 바꾸고, 사이즈는 다양해졌다. 다양한 인종의 모델을 등장시켰고, 차별 없는 캠페인을 펼쳐나갔다. 더 이상 노출이나 외모에 기대지 않았으며, 브랜드의 타깃층도 10대에서 40대까지 넓어졌다.

그리고 그 변화는 수치로 입증되기 시작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1년간 아베크롬비의 주가는 무려 138% 상승. <월스트리트저널>은 ‘엔비디아보다 크게 터진 아베크롬비’라는 제목으로 이 브랜드의 반등을 조명하기까지 했다. 이 추세를 이어간다면, 올해 영업이익 또한 상승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 중이다.

물론, 한국 시장에서 전망은 아직 미지수다. 리브랜딩 이후 비슷한 스타일의 브랜드가 이미 많고, 한 번 실패를 경험한 나라에서의 재진출이 사실상 불투명한 것.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다. 모두에게 외면받던 아베크롬비가 최근 미국에서 다시 주목받으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기 때문.
학창 시절 한 페이지에 강렬히 남은 패션 브랜드, 과연 또 한 번 트렌드를 이끌 수 있을까? 아베크롬비의 다음 장이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