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다르다’라고 말한 감독 미셸 공드리. 그는 아픈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는 내용의 작품 <이터널 선샤인>으로 국내에서 이름을 알렸다.
개봉 당시에는 전국 17만 관객을 동원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2015년과 2018년, 두 번에 걸쳐 재개봉하며 ‘재개봉 영화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지금도 많은 OTT 서비스에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작품.
개봉한지 20년이나 지난 영화를 끊임없이 시청하게 만드는 그의 ‘다름’은 무엇일까. 필자는 그 차이를 미셸 공드리의 펜촉에서 발견했다.






1980년대 파리의 아트 스쿨에서 공부한 그는 영화를 제작하는 와중에도 드로잉을 놓지 않았다. 2009년 오픈한 개인 웹사이트 ‘michelgondry.com’는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페이지를 채웠으며, 19.95달러에 초상화를 그려주는 서비스까지 론칭했다.
‘Your Portrait Drawn By Michel’이라는 코너에서 돈을 지불하고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면 6-8주 후 그가 수채화 그림을 보내주는 서비스. 한동안 이 페이지를 운영했던 그는 이후 작업물을 엮어 <1000 Portraits>라는 책을 발간했다.

해당 웹사이트에서는 두루마리 휴지도 판매했다. 그의 아이디어 스케치가 프린트된 ‘Toilet Paper’는 DVD, 굿즈, 만화책과 함께 판매되었다고.
이처럼 그는 장면을 연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펼쳐진 이야기와 세계관을 시각적인 결과물로 풀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미술 감각은 다큐멘터리 <Is the Man Who Is Tall Happy?>에서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와의 대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작품. 모든 장면은 직접 그린 페이지들로 꾸려졌다.




<Creators>가 ‘미셸 공드리와의 오후’라는 영상을 통해 애니메이션 제작 비하인드를 공개했는데, 여기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프레임을 한 장씩 종이에 그려냈다는 것. 이러한 성향은 그의 실사 영화에서도 드러났던 아날로그적 연출 철학과도 이어진다.
(이터널 선샤인의)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어요. 미셸은 각 페이지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있었고, 우리는 완전 패닉에 빠졌죠.
– Anthony Bregman



미셸 공드리는 작품을 만들기 전, 모든 장면들을 정확하게 구상하는 데에 능했다. 하지만 그것을 시각적 이미지로 실현해낼 때 후반작업의 도움을 받기 싫어했다. 태블릿과 e-펜 대신, 종이를 잉크로 물들였던 낡고 굳건한 드로잉 방식처럼.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누워있는 조엘과 클레멘타인 뒤로 헤드라이트 켜진 자동차를 지나가게 하고 싶어서, 미리 자동차를 넣어놨다는 엄청난 일화도 있다. 팀원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배터리를 넣어두고는 연결한 밧줄을 잡아당겨 차가 움직이는 것처럼 했었죠. 결국 장면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요.”라고 언급했다.


후반 작업을 꺼려하고 소품과 셋업, 카메라 기법으로만 완성하는 것을 선호하는 감독은 많다. 그렇지만 미셸 공드리는 머릿속에 그려낸 판타지적, 연극적 장면들을 걸러내지 않고 담아낸다. 삐죽하게 솟아있던 그의 영감은 아날로그적 연출 방식으로 스크린에 옮겨졌고, 관객들은 매료됐다.
<무드 인디고>, <수면의 과학>에서도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영상의 미학을 확인할 수 있지만 조리되지 않은 미셸 공드리 스타일을 느껴보고 싶다면 2분짜리 단편 영화 <Pecan Pie>를 감상해 보자. <이터널 선샤인> DVD 보너스 클립으로 삽입된 이 영화는 짐 캐리가 ‘침대 자동차’를 타고 주유소를 방문한다는 내용이다. 의식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코믹한 감칠맛은 실소를 유발할 것.

여담이지만 드로잉을 좋아하는 그일지라도, <이터널 선샤인>에 등장하는 조엘 스케치북은 직접 그리지 않았다. 항간에서는 스케치북 속 그림을 두고 ‘미셸 공드리의 창작 노트’라고 칭하며 이 노트가 영화에 등장한다고 말하지만, 크레딧에 따르면 제작자는 폴 프로흐. 인터넷에 떠도는 그림은 한 블로거가 영화를 보고 따라 그린 재창작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