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트맨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 <다크나이트> 속 어둡고 진지한 캐릭터로 기억한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를 비롯한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공개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화 속 배트맨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범죄와 부패, 탐욕의 도시 ‘고담시(Gotham City)’를 지키는 영웅, 배트맨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홀리, 배트맨!”
배트맨이 등장하는 최초의 컬러 영화는 1966년에 개봉한 <배트맨>이다. 2030 세대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장년층은 여전히 당시의 배트맨을 ‘오리지널’로 기억하고 있다. 미국의 배우이자 성우인 애덤 웨스트가 배트맨 역할을 맡았는데, 매번 “홀리, 배트맨”이라는 대사를 부르짖는 캐릭터 로빈과 듀오로 등장하며 열연을 펼쳤다.작품은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가졌다. 아니, 밝다 못해 유쾌하고 천진난만하다. 배트맨은 자주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중간중간 대놓고 개그 요소가 들어가 있는 등 지금의 배트맨과는 정반대였다. 코믹스 요소를 그대로 적용한 것 또한 큰 특징인데 액션 장면에서 경쾌한 음악과 함께 “Ouch!”와 같은 의성어가 화면에 나타났다.
<1966 배트맨>은 TV 시리즈를 그대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지금이야 그걸 누가 보냐고 묻겠지만, 당시에는 TV가 있는 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배트맨을 보러 극장에 찾는 사람이 많았다. 국내에서도 1970년대 TV에서 방영됐는데, 이때 처음 배트맨을 접한 사람들은 여전히 유쾌한 배트맨을 잊지 못할 정도로 당시 국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팀 버튼이 누군데?’
TV 시리즈를 조합해서 만들었던 1966년 작품 <배트맨> 이후로 한동안 후속 작품은 제작되지 않았다. 그렇게 2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 1989년, 전설의 작품이 탄생하게 됐으니.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이다.
지금은 팀 버튼 감독을 모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지만 당시 팀 버튼 감독은 신예였다. 그의 능력을 믿고 흔쾌히 큰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제작사 워너 브라더스는 제작이 진행될수록 초과되는 예산에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을 것. ‘잭 니콜슨의 조커’
팀 버튼 감독은 당시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선택들을 감행했다. 마이클 키튼이 배트맨 역을 맡은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빌런 캐릭터인 조커 역할에 당대 할리우드의 슈퍼스타였던 잭 니콜슨을 캐스팅했을 때는 모두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거액의 출연료를 원했기에 워너 브라더스와 팀 버튼의 부담은 더욱 컸을 것.
그렇게 당시로서는 대규모 예산인 4천만 달러가 투입된 팀 버튼의 <배트맨>이 우려와 논란 속에 공개됐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개봉과 동시에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고, 북미에서만 2억 5천만 달러, 월드 와이드 4억 1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역사적인 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당시 제작진은 불안에 떨다 못해 최악을 생각했다. 팀 버튼 감독은 영화 개봉 직전에 잠수를 타버렸고, 워너 브라더스 간부들은 안주머니에 사표를 준비한 채 최후를 기다렸다고 하니 말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은 지금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크하고 진지한 배트맨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어린이와 함께 보는 가족영화 수준에 머물러있던 히어로 영화 장르의 변화를 가져온 작품이며 후에 등장하는 <다크나이트> 트릴로지를 포함한 수많은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정말 최선이었나요 감독님?”
또 다른 배트맨의 고전 영화로 <배트맨 3 – 포에버>를 꼽을 수 있다. 팀 버튼이 2편까지 감독을 맡았고, 3편은 조엘 슈마허 감독이 마이크로폰을 잡았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진 목록은 영화 역사상 가장 화려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발 킬머가 브루스 웨인 역을 맡았고, 토미 리 존스가 하비 덴트로 출연했다. 심지어 짐 캐리의 리들러, 니콜 키드먼의 닥터 체이스 메리디언, 크리스 오도넬의 로빈까지 볼 수 있었으니 흥행은 따놓은 당상과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충격, 기대에 가득 찬 관객들은 팝콘을 던지며 극장을 나왔고, 혹평이 쏟아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슈마허 감독은 팀 버튼이 만들어놓은 다크 한 분위기의 배트맨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보다 좀 더 정의에 가까운 히어로적인 배트맨을 원했다. 여기에 더해서 워너브라더스가 어린아이들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히어로 액션물을 만들어달라는 압박에 가까운 요청을 했다. 그렇게 모두가 기대했던 다크 히어로 배트맨이 아닌, 애매한 캐릭터가 탄생했고 관객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질서 없는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2005년, 역사에 길이 남을 다크나이트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배트맨 비긴즈>가 공개됐다. 감독은 <메멘토>로 능력을 인정받은 크리스토퍼 놀란. 가장 중요한 브루스 웨인 역은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맡았다. 이후로 2008년 <다크 나이트>, 2012년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총 세 개의 작품이 공개됐고, 모두가 알다시피 모두 찬사를 받았다.
아무래도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중에서 가장 임팩트가 컸던 작품을 꼽으라면 조커와 투 페이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가 아닐 수 없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캐릭터 배트맨을 다른 그 어떤 작품보다 잘 표현했다. 정의로운 검사와 잔인한 살인자가 공존하는 이중인격 캐릭터 ‘투 페이스(하비 덴트)’의 탄생,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절대악 조커와의 사투는 단순하게 즐길 수 있는 히어로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차원의 히어로 영화의 등장을 알렸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는 끝이 났지만, 배트맨은 계속되고 있다. 2022년 3월에 개봉한 맷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은 꽃미남 배우 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새로운 배트맨을 완성했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플래시>에서는 잭 니콜슨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이 깜짝 등장했다. 이처럼 배트맨은 과거의 작품들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기에,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만나볼 배트맨의 모습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