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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스로 다시 보내세요’ 일본의 아날로그 집착, 왜 생겼을까?

완벽을 추구하는 일본의 장인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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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현상(세계적인 차원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꼽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다. 세계 IT 업계를 이끌었던 일본은 어쩌다 고립된 발전을 겪게 됐을까. 이유는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튼튼한 내수시장을 들 수 있다. 해외에 물건을 수출할 필요가 없으니, 자국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제품 개발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계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 일본의 경제 호황기

일본의 깊은 갈라파고스 현상은 오래 유지됐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라는 전설적인 문장이 탄생한 경제 호황기가 무너지기 시작한 1991년, 본격적인 갈라파고스 현상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부동산 시장 거품이 터지며 극심한 장기 침체를 겪게 되는데, 이때 세계 경제는 인터넷 중심으로 산업 형태가 전환되며 큰 변화를 맞이한다. 하지만 일본은 변하는 세계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결국 기업들은 내수시장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고, 2023년 현재까지 아날로그 문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금의 일본을 만든 갈라파고스 현상’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갈라파고스 현상의 심화 덕분에 일본은 다른 나라와 차별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진 나라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일본을 찾는 하나의 이유가 되어주기도 했으며, 자연을 보호하여 빼어난 경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일본이 가진 독특한 ‘아날로그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고객님, 죄송한데 나가주세요”

필자는 현금을 쓰지 않는다. 신용카드만으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통카드 기능까지 탑재된 신용카드는 한국에서 무적이다. 카드를 받지 않는 매장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식당에서 당당하게 카드를 내밀면 낭패를 볼 수 있다. 카드 단말기 자체가 설치가 안 되어있는 매장이 많기 때문. 세계 경제규모 3위 국가 명성에 맞지 않게 매우 아날로그적이다. 심지어 물건 가격도 10원 단위까지 책정해서 잔돈까지 많은데, 여행 갈 때마다 아주 골치 아프다.

일본의 수도, 1200만 인구 수를 가진 대도시 ‘도쿄’도 마찬가지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쿄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식당에 들어가도 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많다. 일본에 간다면 환전은 선택이 아닌 필수.
“부장님, 도장 찍어주세요”

더 깊숙이 들어가 보자. 이번에는 일본의 회사 속 아날로그 문화다. 종이와 펜, 도장과 팩스가 필수였던 옛날 사무실을 기억하는지. 일본은 여전히 그 당시 사무실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자리마다 종이 서류가 빼곡히 쌓여있고, 거대한 팩스는 쉴 틈 없이 가동된다. 열심히 컴퓨터로 PDF 파일을 완성하고, 프린터로 출력해서 팩스로 보낸다. 음, 슬슬 어지럽다.
‘27년 동안 팔리는 노트북이 있다?’

일본에 있다. 파나소닉에서 1996년에 출시한 ‘레츠 노트’다. 디자인부터 요즘 출시되는 최신형 노트북과는 많이 다른 모습. 든든한 두께와 태평양 베젤, 동그란 모양의 트랙패드까지. 21세기의 물건이 맞나 의심되는 비주얼이다.

놀랍게도 1996년 처음 출시된 파나소닉 레츠 노트는 2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큰 디자인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오로지 내부 사양만 업그레이드해서 매년 새롭게 출시되고 있다. 물론 2023년 버전도 출시됐고, 역시나 디자인은 변함없다. “에이, 그럼 누가 사겠어. 분명 잘 안 팔려서 할인 코너에 가있겠지.” 아니, 너무 잘 팔린다. 일본 노트북 판매 순위 5위 안에 매번 들 정도로 인기가 많다.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

사실 아날로그를 추구하는 현상은 일본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물론이고 패션, 오락, 예술 분야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등 편리한 구독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음에도 여전히 DVD를 즐겨 본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든지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여전히 CD와 레코드, 심지어 카세트테이프까지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다.

패션도 빠질 수 없다. 물론 새로운 디자인의 옷도 인기가 많지만, 흔히 입고 버려진 빈티지 옷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관련 문화가 크게 활성화되어 있다.
‘완벽 추구, 장인 정신’

일본의 갈라파고스 현상 고착화를 마냥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하기 때문. 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닌, 이미 있는 것들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데 몰입한다. 그래서 ‘Made in Japan’이 가진 브랜드 파워는 매우 강력하다. 일본에서 제작된 제품들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품질이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전통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장인 정신’ 역시 일본을 상징한다. 기술 발전에 의존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시간과 공을 들여 작업하기 때문에 품질 면에서 최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던 것.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일본의 갈라파고스 현상이 마냥 답답하고, 불합리적인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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