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어 패션’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유행을 빠르게 종용시키고 새로운 트렌드를 쫓기 바빴다. 가장 익숙한 이름의 놈코어에 이어 고프코어, 발레코어, 최근 등장한 바비코어까지. 이러한 코어 패션은 여세를 몰아, 하이패션으로 알려진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강세인 디자인 요소로 자리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스포츠 웨어와의 협업으로 화제가 된 22 시즌 구찌의 아디다스 콜라보 레디 투 웨어. 인플루언서들이 사랑하는 ‘요즘 코어’로는 발레코어가 선두에 있다. 시어한 리본을 곱게 땋은 포니테일에 묶고, 프리미어리그 팀의 유니폼을 구매하는 우리네 모습은 치열함 그 자체.
그들 사이의 바쁜 코어 싸움에 참여하기 꺼려지는 이들은 주목하라. Y2K의 흐름을 대신하면서, 변덕스러운 코어를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대항마 ‘인디 슬리즈(Indie Sleaze)’의 등장이다. 정확히 20년을 주기로 돌아온다는 사이클에 맞아떨어지는, 2000년대 초반을 사로잡은 패션 디자인들의 집합체. 이 역시도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소위 ‘트렌드를 거부하는’ 이들의 조화로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Avril Lavigne
인디 슬리즈는 인디와 펑키 락, 2000년대 잡지 <Sleaze>, 그런지한 플란넬 셔츠. ‘ㄱ나니..?’를 연신 내뱉으며, 과거를 추억하는 어른들이 진정 환영할 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자비한 아이템들을 갖다 붙이라는 말은 아니다. 지나친 옛것에 대한 로망은 자칫 총체적 난국의 착장을 완성할 수 있기 때문.
스타일 방면으로 나아가면, 에이브릴 라빈의 ‘Sk8er Boi’와 ‘Complicated’ 레퍼런스가 제격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스터드가 박힌 블랙 컬러의 레더 브레이슬릿과 니켈 체인을 레이어드한 카고 팬츠. 이 무드에는 깊고 그윽한 아이섀도를 강조해, 스모키 메이크업까지 얹어주는 포인트가 적절하다는 것.
KCM
우리나라로 따지면 KCM과 본 더치 벨트 조합이 가장 선명한 인디 슬리즈가 아닐까. 필자가 생각하는 현시대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위트라면, 자칫 포춘쿠키 핏이 될 수 있는 타이트 핏 진보다는 스트레이트나 세미 부츠컷을 추천한다. 완전히 표방하기보다는 적절한 흐름으로 레이어링 하는 것이 포인트.
니팅으로 짜인 나시를 입는다면 모노톤의 셔츠를, 적당히 빛바랜 후드에는 적당히 찢어진 데님 팬츠를.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한 번에 소화할 심산이라면, 플러스로 팔 토시까지 얹어주는 ‘약간의 과함’을 겸비해 보자.
이효리
다시 봐도 연신 리즈임을 보여주는 이효리의 그때 그 시절. 그녀가 소화해낸 인디 슬리즈식 포인트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최근 ‘다시 하고 싶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올린 그녀의 광고 재개 선언에 팬들의 반응은 열렬했다. 크롭 기장의 플란넬 셔츠를 당당하게 소화해낸 사진 속 그녀.특유의 당당함과 휘날리는 헤어스타일은 일종의 인디 슬리즈식 애티튜드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더티한 프린팅의 브라탑에 배꼽까지 내려오는 체인 넥클리스, 카고 팬츠와 함께한 스틸레토. 화려하고 자유분방함 그 자체로 이효리는 가볍게 웃어넘긴다.
에디 슬리먼의 재해석 : CELINE
그렇다면, 다시 현대로 돌아와 우리가 적용해 볼 것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에디 슬리먼의 23 S/S CELINE을 확인해 보자. ‘디스펑셔널 바우하우스’라는 이름의 컬렉션은 인디 슬리즈의 메인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록밴드’를 대폭 활용한 쇼.
뉴웨이브 밴드 구스타프의 사운드와 함께하여, 컨템퍼러리 룩을 관능적으로 표현하며 게스트들을 유혹했다. 시퀸과 스팽글의 찬란한 결합으로 탄생한 탑, 무심하게 오픈한 파워솔더의 블레이저, 얽매이지 않는 위치의 펜던트와 링, 진주의 조합. 이 밖에도 조명할 수 있는 키워드라 함은 카모플라쥬, 태슬 컷, 스키니, 플랫폼 워커부츠 등이 있다.
동일선상에서 끊임없는 사랑을 받았던 Y2K의 대항마, 인디 슬리즈의 차례. 만일을 위해 모셔두었던 스키니 진들의 환호성을 들어줄 시간이다. 어쩌면 플래시를 터뜨리고 0.5배의 광각 촬영을 즐겨 하는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때 그 감성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
해삼을 따러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타이트한 핏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감성을 떠올리며 상상해 보자. 워커 슈즈와 체인, 레더 재킷, 경계가 없는 컬러 선택의 스펙트럼. 모든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는 인디 슬리즈의 지붕 아래서 당신을 향한 환영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