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가 바뀌는 과정을 수차례 지켜보면서도, 일관된 ‘록 스프릿’의 자세를 고수해 온 브랜드가 있다. 디렉터 키타무라 노부히코가 이끌어 온 도쿄의 패션 브랜드 히스테릭 글래머(Hysteric Glamour)다. 60세가 넘었지만 록 밴드의 낡은 LP 판을 뒤지던 14살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 벽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영감의 아지랑이로 가득한 그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글로우업>과 키타무라 노부히코가 논한 패션과 음악, 인생에 대하여.
히스테릭 글래머는 80년대부터 도쿄 패션 문화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맞다. 1984년부터 시작되었으니,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다.
어떻게 히스테릭 글래머를 시작하게 되었나.
19살쯤 오존 커뮤니티라는 곳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던 것이 시초였다. 당시 패션 학교의 졸업반이었는데, 회사 측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시작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네왔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히스테릭 글래머.
지금 이 오피스도 히스테릭 글래머를 설립했던 당시의 오피스인가.
아니다. 처음 시작한 곳은 굉장히 작은 아파트 원룸이었다.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1985년도 즈음. 그때부터 컬렉션 구상이나 작업들은 모두 이곳에서 하고 있다. 물론 시부야에 있는 내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기도 하지만.
오피스 전체에서 ‘록 스피릿’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중학교 때는 록 음악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특히 서구권 록 음악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르. 당시엔 힙합이나 테크노같은 장르도 성행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내 관심사는 그래픽 디자인, 사진, 예술, 레코드 쪽으로 확장되었다.
아직도 음악에서부터 영감을 받고 있나.
많이 받는다. 레코드 커버나 음악 매거진에서부터 영감을 얻기도 하고 뮤지션들의 패션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요즘에 즐겨 보는 잡지가 있다면?
지금은 없다. 예전에는 포르노 매거진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스크랩해 둔 것들은 아직까지 갖고 있다. <플레이보이>와 같은 잡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60년대, 70년대에 발간된 것들 중 유명하지 않은 잡지들을 좋아한다. 이런 이미지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스캐너를 사용해 그래픽 아트에 녹여내는 것이 나의 방식. 요즘의 잡지들도 나쁘지 않지만, 이런 빈티지 잡지에서 얻던 신선한 아이디어는 없는 것 같다.
긴 세월 동안 음악 취향이 바뀌기도 했나.
줄곧 유러피안, 특히 영국 음악을 좋아했고 아메리칸 록 문화도 좋아했다. 펑크, 사이키델릭 등으로 흘러간 관심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음악도 즐기게 했다. 독일 음악은 정말 최고다.
디깅을 거듭하다 새로운 음악 장르를 탐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한 3년 전부터 한국 영화를 보다 그 사운드트랙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마약왕>을 통해서 김정미의 [NOW]를, <택시 운전사>를 통해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산울림이라는 밴드도 굉장히 좋아해서 LP도 8개나 갖고 있다. 히파이브의 [Merry Christmas]도 추천하는 앨범.
K-POP 아이돌인 뉴진스가 히스테릭 글래머의 제품들을 많이 착용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K-POP에도 관심이 많은가.
K-POP도 좋아한다. 뉴진스도 알고 있다. 음악 사운드가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디자인을 즐겨주어서 기쁘다. 히스테릭 글래머 컬렉션을 종종 입고 나오는 그룹 XG도 알고 있다.
음악 씬과는 굉장히 밀접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직접 뮤지션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는지?
90년대에 DMBQ라는 일본 밴드와 함께 미니 앨범을 내기도 했다. 내가 맡았던 종목은 키보드와 신디사이저. 2주 가까이 음악 스튜디오를 드나들며 작업하는 과정이 즐겁기는 했다. 하지만 한 번으로 족하다. 음악을 잘 했으면 진작 뮤지션이 되었겠지.
리스너로서 즐겨 찾는 베뉴가 있나?
많이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거의 찾지 않았다. 시부야와 신주쿠에 브릿지(Bridge)라는 뮤직 바가 있는데 사운드 시스템이 훌륭해서 좋아하는 곳이다. 내 친구는 그곳에서 DJ를 하기도.
본인도 DJ 경험이 있는가?
있다. 지금도 가끔 디제잉을 한다. 마지막으로 했던 이벤트는 후지록 페스티벌. 피라미드 가든이라는 구역에서 언더커버의 다카하시 준과 함께 3시간 가까이 디제잉을 했다.
히스테릭 글래머가 개최한 ‘BOOTLEG’ 이벤트가 어제 막을 내렸다. 그곳에서는 실크스크린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고.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13살 때 라디오에서 패티 스미스의 ‘Piss Factory’라는 곡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는 컴퓨터도, 유튜브도 없어서 음악 잡지들을 뒤져가며 그녀를 탐구했다. 그 디깅 과정에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를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앤디 워홀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팝아트 문화에 대해 빠져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작년에 공개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키코 코스타디노브와의 협업 컬렉션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먼저, 어떻게 성사되었나.
나의 오랜 친구인 마이클 코펠만을 통해 협업이 성사되었다. 마이클은 90년대에 히스테릭 글래머 UK를 담당해 주었던 친구다. 마이클과 가까운 사이인 키코 코스타디노브가 그를 통해 협업을 제안해 온 것. 젊은 층에게 좋은 케미스트리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진행하게 되었다.
협업 과정은 어떠했나.
키코의 팀이 전체적인 디자인을 맡았고, 우리의 그래픽을 이후에 얹었다. 티셔츠 같은 제품들 두어 개는 일본에서 제작하기도.
지금 해당 컬렉션은 두 배가 넘는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그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음, 글쎄. 사실 별로 관심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정 컬렉션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하는 문화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런 쪽으로 가고 싶지도 않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천천히 전개되는 브랜드가 내 취향이다.
그러한 가치관이 한 브랜드를 40년간 이끈 것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까.
뭐랄까, 패션 비즈니스에는 큰 관심이 없다. 물론 그들을 깊게 존중하지만 내가 속해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정체성을 찾는 곳은 음악 업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뮤지션의 무대 의상을 보고 어떤 청바지를 입었는지, 어떤 자켓을 입었는지 분석하고 빈티지 숍에 가서 비슷한 의상을 구매하고. 원래부터 그런 과정을 즐겼다. 애초에 디자이너 브랜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21살, 내가 히스테릭 글래머를 시작했던 당시에는 정말 경험이 없었다. 당시 나를 도왔던 것은 록 음악과 세컨 핸드 패션이었다. 그 ‘보물 찾기’식 탐구를 사랑했다. 지금 내가 지향하는 것도 비슷하다. 누군가 히스테릭 글래머의 옷을 구매하고, 그러다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그렇게 여기저기를 떠돌다 몇십 년이 지나 한 꼬맹이가 빈티지 숍에서 그 제품을 집어 들며 “와! 이게 뭐야!”라고 외치며 구매하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삶에 천천히, 분명하게 녹아들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최근 5년, 10년간 젊은 친구들이 히스테릭 글래머의 아카이브를 즐겨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걸 본 뒤 내가 바라던 꿈 중 하나가 이뤄졌구나 생각했다.
빈티지 ‘보물 찾기’를 위해 찾는 스팟은 어디인가.
고엔지? 하라주쿠나 시모키타자와에도 많지만 가격대가 높은 편. 고엔지가 더 나은 것 같다.
단골가게 한 곳만 공유해 주자면?
드로드(Drodd). 장난감 가게다. 희귀하지만 합리적인 가격대의 빈티지 아이템들이 많다.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있는 숍들과 비슷한 것 같다. 그곳에도 빈티지 장난감이나 만화책, 아트북이 많다. 메이드, 고스로리 관련 숍들도 많다.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오타쿠 컬처를 좋아한다면 꼭 찾아야 할 지역.
국내의 빈티지 숍에서도 히스테릭 글래머의 제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음, 하지만 가품일 수도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동대문과 ‘짝퉁과의 전쟁’을 치렀다. 초반에는 가품을 가려내기 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기술이 발달해 정말 구별하기 어려웠다.
전쟁의 끝은 어떠했는가.
결국 우리가 이겼다. 회사 측에서 한국 공장에 외주를 준 일본 회사를 알아냈다.
새로운 브랜드들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지만, 히스테릭 글래머처럼 수십 년간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다.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좋은 동료, 좋은 공장 그리고 탄탄한 소비자들까지. 삼박자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같다. 아이돌과 비슷하다.
새롭게 브랜드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강한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융통성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는다. 브리티시 패션, 아메리칸 패션, 아메리칸 캐주얼, 아웃도어, 군복 등. 끝도 없다. 그러한 영감들을 머릿속에 넣고 뒤섞으며 본인들의 작업물에 반영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디자인은 창작보다는 편집에 가까운 것 같다.
요리하는 과정하고도 비슷하다. 한식, 중식, 양식 모두 비슷한 재료들을 가지고 요리하지만 결국 고유의 방식과 향신료들을 넣어 독보적인 음식을 완성하지 않나. 그러한 방식들이 나에게는 굉장히 잘 맞았다. 국경을 가리지 않고 영화, 음악, 포스터 등으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내 방식대로 재해석하는 것.
지금까지 있었던 히스테릭 글래머의 이벤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벤트는 무엇인가.
30주년, 20주년, 10주년. 내년에 40주년을 맞이하는 만큼 큰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음악, 디제잉, 댄스까지 모두 집결될 예정. 이벤트를 위한 프로젝트도 구상 중에 있다.
계획 중인 협업 프로젝트가 있나?
3개 정도 있다. 알려줄 순 없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아티스트들과의 협업도 계획하고 있다.
협업을 진행하는 아티스트들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다면?
인지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취향과 나의 취향이 맞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BOOTLEG 행사도 그렇게 성사된 것. 함께했던 써클 헤리티지의 슌키도 20대 초반이다. 히스테릭 글래머의 그래픽 위에 본인만의 색깔을 넣어 재창작한 디자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국과도 협업한 적이 있나?
참이슬과의 콜라보는 디자인 단계까지 갔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코로나 시기가 겹친 것도 무산된 이유 중 하나. 얼마 전 60세 생일을 맞았는데, 직원들이 ‘처음처럼’을 ‘노부처럼’으로 바꿔서 선물해 주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은 4~5병씩 마시던데 어떻게 그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1병만 마셔도 완전 필름이 끊기는 편.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이제는 젊은 세대를 서포트 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히스테릭 글래머 X 언더 커버’, ‘히스테릭 글래머 X 솔로이스트’, ‘히스테릭 글래머 X 슈프림’과 같은 컬렉션들이 그 생각의 산물. 우리들은 늘 그런 브랜드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