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를 읊듯 노래를 부르는 ‘가객(歌客)’, 포크송 황제,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김광석. 그의 음악적인 삶은 학창 시절부터 시작됐다. 앳된 중학생 시절에는 바이올린을 켜며 악보를 익혔고, 성숙함이 묻어나는 고등학생 시절에는 합창부에서 보컬에 대한 기초와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음악에 눈부신 재능을 보였던 김광석, 당연하게도 음대 진학을 꿈꿨다. 하지만 기구했던 집안 형편, 그는 고심 끝에 음대 진학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학구열이 높았던 김광석은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음악과는 멀어지는 듯했다. 과연 타고난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당시 만연했던 공포정치, 그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잃었던 김광석. 방황하던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젊은 예수’라는 노래책을 선물받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숱한 고난을 겪었다. 대학의 학사경고, 가족의 반대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며 음악가로서의 길을 막아섰기 때문. 하지만 김광석은 굳건했다. 수많은 공연에 참여했고, 민중가요를 끊임없이 불렀으며,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해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다.
큰형의 군 복무 중 사망으로 인해 짧은 군 생활(6개월)을 보낸 김광석. 그의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전역과 함께 시작됐다. 그리고 1987년, 친구들과 그룹 동물원을 결성하며 노력의 결실을 맺었고 대망의 1989년 10월, 첫 번째 솔로 앨범 [김광석 1]을 내놓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행보를 시작했다. 김광석은 솔로 활동을 통해 명곡들을 쏟아냈다. 1집의 ‘기다려줘’, ‘슬픈 우연’, 2집의 ‘사랑했지만’, ‘그날들’, ‘사랑이라는 이유로’, 3집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외사랑’, ‘나의 노래’, 4집의 ‘혼자 남은 밤’, ‘서른 즈음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 전부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위에 언급된 곡들은 2023년 현재도 대체 불가능한 감성과 멜로디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 버전을 공개하며 경의를 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김광석은 너무 이른 나이에 하늘의 별이 됐다. 1964년 세상에 태어나 1996년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모두를 슬픔에 잠기게 했고, 그만큼 큰 파장을 불러왔다.
김광석은 1996년 1월 6일 새벽, 본인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바로 전날 HBS 겨울나기에 출연해서 공연을 했기에 사람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가족은 자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지인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음악 동호회를 통해 자주 그를 봐왔는데 우울증 증세는 전혀 느낄 수 없었고, 타살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가족과 지인의 타살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사와 글, 일기 등 메모와 쓰기를 즐기던 김광석이 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우울증이 있었다면 분명한 신호가 있었을 텐데, 그 누구도 그러한 신호를 받지 못했다는 점. 셋째, 그의 죽음 당시 함께 있던 부인의 진술이 계속 바뀌었고, 과거에 가족들과 지속적인 재산 다툼이 있어왔던 점. 또 부인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김광석의 의문스러운 죽음은 2023년 현재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지난 2017년, 그의 음악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의문을 담은 영화 <김광석>이 개봉했다. 영화로 인해 사건은 다시 한번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당시 미국으로 떠났던 딸 김서연 양이 2007년에 사망했지만 은폐되어 왔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큰 파장을 만들었다. 결국 유족과 일부 정치인에 의해 부인은 살인 및 소송사기로 고발됐고, 지금까지도 수사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