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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산울림’의 모든 것

수많은 후예들을 낳은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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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경, ‘산울림’을 추억하는 많은 팬들은 그들의 재발매 LP 소식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산울림이 활동하던 당시 이후 최초로 재발매된 것. 얼터너티브와 모던 록, 헤비메탈까지. ‘산울림’이라는 장르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자유롭지만 그들의 색깔은 어디서도 따라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 형제. 그들만의 색깔로 세상을 노래하는 현재의 가요계가 있기 전, 한국의 대중음악이 자리하게 된 시점을 복기하고 싶다면 1980년대로 올라가 보자.


김창완, 김창훈, 김창익

자신이 어떤 전공을 진학하는지도 몰랐던 소년 김창완. 그렇다기엔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서울대’로 향하게 되었고, 남은 형제들 역시 서울대와 고려대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책가방에 든 것은 전공 책이 아닌 악보집. 연습실에 계란 판으로 방음재의 모양새만 만들어놓은 탓에 동네 이웃들의 원성을 살 정도로 그들의 대학 시절엔 늘 음악이 함께 했다. 그러던 중 들려온 ‘제1회 대학가요제’의 소식. 음악쟁이 삼 형제가 출전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들의 출전곡, ‘문 좀 열어줘’의 혁신적인 사운드와 퍼포먼스로 예선 1등을 거머쥔 산울림. 하지만 재학생만이 출전할 수 있다는 참여 조건 탓에 ‘샌드 페블즈’에게 우승 트로피를 반납하게 된다. 맏이인 김창완이 당시 졸업생 신분이었기 때문. 그렇지만 샌드 페블즈의 출전 곡, ‘나 어떡해’ 역시 둘째인 김창훈이 작사 작곡한 곡이다. 산울림의 곡들로 채워진 대학가요제의 단상은 그렇게 80년대 밴드 음악의 포문을 열었다.


종래에 들을 수 없던, 청춘의 ‘산울림’

김씨네 삼 형제는 부모님께 선물로 받은 합주 세트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 합주 세트는 흑석동을 산울림의 사운드로 가득 차게 만들었고, 학교를 졸업해 세상을 나서기 전 순수하게 ‘음반 하나 만들자’던 다짐의 결실을 맺게 된다. 이윽고 84번 버스와 함께 ‘서라벌 레코드’로 향하게 된 그들의 데모곡. 어쩌면 그들에겐 안성맞춤의 선택이었을까, 서라벌 레코드는 당시 비주류의 음악을 취급하던 유통사였다. 형제는 연예계에 입성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밤무대나 커버 곡 등을 거부하고 오로지 공연과 자작곡으로 산울림의 이름을 알렸다. 이윽고 방송국의 무대 없이도 라디오, 다방에서는 그들의 음악을 재생시켰고, 사람들의 입에서는 ‘아니 벌써’하며 가벼운 아침 발걸음을 흥얼거리게 된다.


시대의 격변, 산울림의 격동

산울림의 출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차고에서 합주나 녹음을 시작한 형태의 ‘개러지 록’의 지저분하고 생생한 사운드, 순수하고 낭만 가득한 가사를 노래하며 몽환을 부르짖는 ‘사이키델릭 록’을 모두 아로새긴 것. 그야말로 이렇다 할 장르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었다. 당시의 대중가요라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곡들의 구성과 형태를 가져가지 않았으며, 기존 곡들보다 재생시간을 넘어서지만 결코 상관하지 않았다. 이어 현재까지도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사랑받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와 ‘나 어떡해’를 포함해 ‘산울림 제2집’을 발표. 이에 한 인터뷰에서 김창완은 ‘일정한 틀이 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나의 음악어법은 말로 하는 구어체’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기며 산울림의 색을 정확히 회자시켜 주었다. 1집의 연장선상에 있던 2집 수록곡에는 사촌동생인 ‘김난숙’ 표 오르간 사운드가 합류되기도. 또한, 향상된 프로덕션도 더해져 파격적인 그들의 음악적 실험실을 더욱이 확장시켰다.


내가 ‘포크 록’을 하면 깜짝 놀랄 거야

3집 타이틀 ‘내 마음’엔 키보드 사운드를 배제하고 록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아, 10분가량 혹은 10분이 넘어가는 사이키델릭의 향연을 벌인다. 산울림만의 실험정신에 대중들이 보인 반응은 다소 난해함이었을까. 아쉽게도 3집은 지난 앨범에 비해 부진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그들의 ‘사이키델릭 록 전성기’는 점차 저물어 갔다. 김창훈과 김창익의 군 제대 후, 두 형제가 복귀하고 공개한 신보는 포크 록과 매우 가까워진 것. 이때 탄생한 곡이 바로 ‘너의 의미’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운드로 청자들을 공략하여 성공을 거둔 그들이지만, ‘록 밴드의 정수’라는 타이틀은 해외 아티스트들을 변모해 그들의 사운드를 정립하며 생겨난 다른 동대의 아티스트들에게 바통을 넘겨주게 된다. 그다음은 90년대에 생겨난, 현시대의 K-POP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아이돌이 대중음악의 주류를 잡았다.


‘산울림’ 다음은 ‘김창완밴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커피프린스 1호점> 등 OST 작업으로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던 첫째 김창완. ‘김창완밴드’를 결성하며 오로지 형제 셋이 함께해야 산울림이라는 이름을 담고 싶다는 김창완이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 후배 뮤지션들과 함께 산울림 앨범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장기하와 아이들’ 같은 밴드의 뮤즈로 언급되며 아티스트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현재의 시점. 당대의 평론가들은 산울림을 ‘아마추어 같고 형편없는 연주력’이라며 산울림을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울림과 김창완밴드, 김창완이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2027년, 산울림의 50년

22년 강남에서 열린 김창완의 개인전은 노래와 필모그래피가 아닌, 작품으로써 대중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사실 산울림의 데뷔 이래 앨범 커버는 오로지 김창완의 작품이었다.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음악뿐만이 아닌, 그의 이야기 자체가 아닐까. ‘칸 만들기’나 ‘동그라미’ 같은 김창완의 시를 읽어보면 포근한 정서이지만 결코 메시지는 당차고 자유분방하다. 최근엔 2027년에 맞이할 ‘산울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밴드 ‘오월오일’의 리메이크곡 ‘손’이 공개되었다. 약 50개의 달하는 곡을 순차적으로 발표하게 될 예정. 다양한 싱어송라이터들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한국 록 역사에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산울림을 추억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그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리스너들은 꾸준히 공개될 리메이크 프로젝트도 열렬히 환영하며 산울림의 후예들도 마다할 이유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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