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나 자연재해로 폐허가 된 세상. 집도 재산도 모두 날아가고 남은 건 몸뚱어리 하나뿐일 때. 비상식량, 무기는 앞으로의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일 터. 디스토피아 영화들만 봐도 어떤 식량과 무기를 구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칼보다 총을, 잉여 식량을 가지고 있는 자가 권력을 쥘 수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어쩌면 우리는 진짜 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폭격이든 뭐든 집이 없어졌다면 우리의 몸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옷’이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지구 멸망설과 종말론에 불안함을 느낀 적 있을 터. 일본의 패션 브랜드 ‘파이널 홈(FINAL HOME)은 그런 우리들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우리의 궁극적인 집은 옷이다

이세이 미야케 디자인 연구소에서 디자이너 커리어를 시작한 파이널 홈의 디렉터 ‘츠무라 코스케’. 1994년, 그는 이세이 미야케의 산하 그룹 A-NET에서 파이널 홈의 출발을 알렸다.
시작은 ‘핵 전쟁으로 지구가 종말 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옷’이었다. 핵 전쟁, 가깝고도 먼 미래 같지만 직접 겪은 일본에 핵 피해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큰 지진과 재난에 항시 대비해야 하는 일본이기에, 파이널 홈의 정체성은 그저 독특한 게 아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최근 패션 브랜드에서 친환경을 내세우며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소재인 ‘플라스틱’과 ‘나일론’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썩지 않아 골머리를 앓는다는 소재들이 지구 종말 이후에도 골칫거리라는 점은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썩지 않아야만 오래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장 환경오염으로 지구를 썩게 만든다는 것들이 결국 생존을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매력을 더욱 끌어당긴다.
주머니만 44개입니다
집도, 창고도 생존에 필요한 물건을 놔둘 공간의 부재는 ‘주머니’로 해결해야 한다. 파이널 홈의 대표 제품, 나일론 롱 코트 ‘서바이벌 파카’에는 주머니만 총 44개가 있다. 이 정도면 물건만 있다면 며칠 생존에는 거뜬할 것. 비상식량과 장비는 물론 보온을 위해 신문지나 보온재 등을 주머니에 넣어둘 수도 있다.

노숙자처럼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존에 특화된 의류이지만 문제점은 있다. 제품의 가격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다 잃고 몸만 남은 상황에서 파이널 홈의 제품을 구매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업을 이어나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그는 대체 방안을 마련했다.
“이 옷을 더 이상 입지 않게 되면,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파이널 홈의 제품에는 해당 문구가 담긴 카드가 부착되어 있다. 파이널 홈에게 다시 돌려주면, 원래 목적이었던 난민, 노숙자들에게 제공될 예정이라고. 모순적인 상황은 제작자와 소비자의 마음으로 사회 환원이 이루어져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패션인가, 아닌가

츠무라 코스케의 파이널 홈은 컬렉션보다 ‘프로젝트’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그렇다고 극한의 생존 상황이 아니라면 필요 없는가?라고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 츠무라는 <사부카루(Sabukaru)>와의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트렌치코트는 전쟁 중에 발명되었고, 청바지도 골드러시 당시 환경에 맞춰 제작된 의류다”
이미 우리는 OO 코어, OO 웨어라는 키워드처럼 수많은 트렌드를 겪은 바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파이널 홈처럼 확고한 목적, 사용 용도가 없는 옷들이 많아지고 있다. 유행으로 빠르게 소비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일들이 속속히 등장하고 있다.

츠무라는 파이널 홈의 제품을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견딜 수 있어야 하며, ‘패션’으로서도 착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그는 소비 여력이 있는 이들이 패션으로서 이를 비싼 값에 소비하고, 이후 입지 않기 시작할 때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생존에 유용한 비친환경적인 소재는 재활용을 통해 친환경적인 메시지까지 던진다.
디스토피아를 위해 의류를 제작하는 파이널 홈은 긍정적인 순환이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