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퍼렐 윌리엄스’의 루이비통 24 남성 캡슐 컬렉션에 한국인 이름이 티셔츠에 떡하니 적혀있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었다.
그의 이름이 루이비통의 작품에 적힌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22년, 91세의 나이로 루이비통과 협업했던 적이 있기 때문. 한국인 최초였다. 한평생 자신의 예술을 지향했던 그는 예술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음에도 더하면 더했지, 절대 펜을 놓지 않았다.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그가 폐암 3기를 판정받고 SNS를 통해 썼던 글이다. 2023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작품 활동에 진심이었던 화백 박서보.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화백이었던 건 다 이유가 있다.
한국 작가 최초로 루이비통과 협업하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부정하기 힘들다. 듣고 또 듣던 말이겠지만 K-POP이 빌보드 차트에 올라가고, 외국 팬들의 입에서는 “I LOVE KOREA”가 나오고 있다.
브랜드 이미지가 최우선 사업인 명품 의류 브랜드에서도 한국 셀러브리티를 앰버서더로 차용해 마케팅에 박차를 가한다.
그중 루이비통은 제이홉, 정호연 등의 한국 톱스타들을 글로벌 앰버서더, 브랜드의 얼굴로 선택했다. 이렇게 마케팅 혹은 퍼포먼스를 위해 함께한 적은 있으나, 한국인이 루이비통과 ‘작품’을 함께한 적은 없었다.
2022년, 루이비통이 168년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과 협업을 했다. 루이비통의 선택을 받은 한국인 예술가는 바로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
루이비통은 세계적인 현대미술작가들과 함께 루이비통을 대표하는 가방 ‘카퓌신’에 그들의 예술적 감각을 담아내는 ‘아티카퓌신’이라는 가방 컬렉션을 매년 진행한다. 200점 한정으로 생산되며, 출시되자마자 품절을 시킬 정도로 인기가 많은 컬렉션이다.
그의 가방은 버건디 컬러를 배경으로 긴 선을 그어 완성되었다.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 중 2016년 작품이 연상된다.
묘법의 디테일은 이번 캡슐 컬렉션에서도 드러난다. ‘PARK SEO BO’라는 영어 이름 석 자가 루이비통 티셔츠에 박혀있기도 하다.
내 그림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루이비통에서 디테일을 살렸던 박서보 화백의 연작 <묘법>은 대표적인 그의 작품이다. 캔버스에 배경을 물감으로 작업하고, 채 마르기도 전에 연필로 계속 반복하여 선을 긋는다. 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고. 묘법은 둘째 아들이 연필로 낙서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그의 작품은 선이 그림처럼 그어져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반복된 동작으로 인해 꽤나 울퉁불퉁하다.
“나에게 있어 그림은 ‘수신(修身)’을 위한 수단이며 도구다. 그러나 그 도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수신의 결정체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예술 작품을 세 가지 단어로 정의 내렸다. ‘행위의 무목적성, 무한 반복성, 행위 과정의 흔적 정신화’. 그에게 예술은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자신이 직접 수행하는 과정을 캔버스에 담아내어 감상자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박서보 화백은 목적 없이 계속되는 선 긋기를 통해 흔적을 남긴 것이다.
박서보 화백이 한국을 대표하고, 루이비통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한국의 정신을 작품에 잘 담아내기 때문일 것.
너의 스승을 닮지 마라
학교 성적을 잘 받으려면 스승을 거울삼아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사수를 잘 따르며 업무를 빠르게 익혀야 할 것. 주어진 환경에서 중간 이상은 가는 생존 방법이다.
그러나 박서보 화백은 그게 싫다고 말했다. ‘너의 스승을 닮지 마라’는 박서보 화백이 홍익대 미대 학장으로 있을 당시 교실훈이었다.
교수가 정한 물건을 그리는 게 아닌, 물건부터 학생이 원하는 것으로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승도 동료도 닮지 말고 오직 자신의 길을 가라고 한다.
박서보 화백은 그의 어록대로, 언제나 홀로 길을 나섰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라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의 성향을 답습했던 국전에 망설임 없이 반기를 들었다. 많은 기성인들에게 질타를 받았지만 결국 시대적 관행을 끊어내고, 현대 미술의 시대를 열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스스로 과거의 성공에 매달려 있어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세상이 변하는데, 나 혼자 그 자리에 서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그는 그렇게 계속해서 변화를 도모했다.
그의 묘법에도 세 번의 변화가 있었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초기 묘법부터 한지의 물성을 극대화시킨 중기 묘법,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단풍을 보러 갔다가 자연에 감명받아 원색을 사용하기 시작한 색채묘법까지.
사람들은 그를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라고 불렀다. 하긴, 하루 14시간을 작품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폐암 3기에 걸려서도 안부 전화를 받을 시간에 펜 잡고 선 하나 더 긋겠다고 말하는 선생이었으니, 당연한 수식어였다.
변화에 변화를 거쳐 세계에서 인정받는 화백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변화해도 추락한다
‘변화하지 않아도 추락하고, 변화해도 추락한다.’ 이는 그가 정한 묘비명이다. 변화를 잘못해도 추락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변화를 시도해도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지 못한다면 그대로 추락해버릴 것. 그는 올바른 변화를 위해 묘법을 통해 자신을 비워나가고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반드시 오고, 자신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박서보 화백의 마지막 비움이 아니었을지.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 다 익으면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지게 돼있어. 생명이란 그런 거야”
우리는 익어가고 있다. 맛있게 익어갈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욕심내지 않고, 비워나가고, 계속해서 변화하다 보면 우리도 박서보 화백과는 다른 맛의 멋진 열매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