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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힙합으로 돈 좀 벌었어

아디다스와 Run D.M.C.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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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체인 목걸이와 페도라, 끈 없이 혀를 내놓은 채 신은 아디다스 슈퍼스타. 이 ‘올드스쿨 패션’의 삼박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이들이 바로 ‘Run-D.M.C.(이하 런 디엠씨)’였다.

그들은 이렇게 무대에 올랐다

디스코로 반짝였던 1970년대 미국. 당시 무대에 막 오르기 시작한 래퍼들⎯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아프리카 밤바타, 멜리 멜 등⎯은 디스코와 글램 록 패션을 그대로 가져왔다. 반짝이는 셔츠와 플레어 팬츠, 화려한 재킷. 이는 힙합이 시작된 브롱스 거리의 거칠고 솔직한 무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힙합 그룹들이 상업적으로 넘어가며, 브롱스에 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공식을 깨부순 것이 바로 런 디엠씨였다. 스트릿 웨어를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린 것이었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던 이 패션은 ‘입고 있는 그대로 무대에 서라’는 매니저의 단순한 조언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들의 패션으로 인해 힙합의 스트릿 패션이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우리가 스트릿을 만든 게 아니라, 스트릿을 TV로 옮겨왔을 뿐이다

“우리의 우상은 비보이, 브레이크 댄서,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늘 봐왔던 고등학생들이었다.”

힙합의 근원지였던 브롱스에는 늘 비보이, 비걸들의 브레이크 댄스와 그래피티가 함께 했다. 런 디엠씨는 그들의 패션을 그대로 반영하여 캉골 버킷햇과 헐렁한 lee 데님을 입고 무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아 살 수 없었던 아디다스 슈퍼스타와 골드 체인 목걸이까지. 그렇게 런 디엠씨의 아이덴티티가 완성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첫 아디다스를 받았다. 자기 전에 그걸 침대 옆에 두고, 손을 흔들며 ‘잘 자’ 인사를 남기고 잠들었다. 다음 날 신을 생각에 너무나도 설렜다.”

마이 아디다스

끈 없이 혀를 내놓은 채 신고 다닌 런 디엠씨의 아디다스 슈퍼스타. 이는 감옥에서 죄수들이 끈으로 목을 매달지 못하도록 신발 끈 없는 신발을 준 것에서 유래했는데. 그 기능적 형태를 하나의 스타일로 끌고 온 것이다. 그리고 런 디엠씨는 아디다스에 대한 찬사로 싱글 ‘My Adidas’를 발매했다.

“My Adidas only bring good news and they are not used as felon shoes. 내 아디다스는 좋은 소식만 가져오지, 범죄에 사용되는 신발이 아니야.”

이처럼 슈퍼스타는 이들 손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얻었다.

‘My Adidas’의 인기는 곧바로 판매량 폭발로 이어졌고, 아디다스 직원들은 런 디엠씨의 공연을 직접 보기 위해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향했다. 공연 도중 멤버들이 슈퍼스타를 들어 올리자, 수만 명의 팬들이 동시에 아디다스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아디다스 임원은 그대로 뉴욕 본사로 달려갔고, 결국 힙합 그룹 최초의 100만 달러 광고 계약이 성사됐다. 이는 스포츠 브랜드와 힙합 아티스트의 첫 공식 협업이었다.

아디다스와 Run D.M.C.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둘은 여전히 서로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슈퍼스타 발매 50주년을 기념해, 아디다스는 런 디엠씨와 다시 한번 협업하며 이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끈 없는 전통적 실루엣은 유지한 채 과거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복원한 것이었다. 이후에는 잼 마스터 제이를 기리기 위해 그의 초상화를 텅에 새긴 모델이 출시되었다. 이미 한 시대를 넘어선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올드스쿨 패션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디다스와 Run D.M.C.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것들은 이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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