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인가, 타살인가 26살에 의문사한 전설의 가수

포지션 임재욱이 2000년에 발매한 노래 ‘I Love You’, 이 곡의 원곡은 오늘 이야기할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오자키 유타카(Yutaka Ozaki)’의 것이다.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83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1992년에 26살의 어린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9년 동안 폭발적인 활동을 한 그가 남긴 음악들은 여전히 많은 뮤지션과 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반항아 오자키

오자키 유타카는 문제아였다. 학창 시절부터 술과 담배를 즐겼고, 패싸움으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기타와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오자키는 집에서 작사와 작곡을 시작했고, 1982년 CBS 소니 재팬 오디션에 합격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밤에 몰래 학교에 들어가 창문을 깨트렸어'

오자키는 오디션에 합격한 지 불과 1년 만인 1983년, 불후의 명곡 ‘I Love You’가 수록된 1집 앨범 [17세의 지도]를 발매하며 당차게 데뷔했다. 사춘기 10대의 불같은 반항심과 열정이 담긴 앨범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와 출중한 외모를 가진 자퇴생 오자키의 이미지와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켰다. 

오자키는 멈추지 않고 1985년에 2집 [회귀선]을 발매했는데, 수록곡 ‘졸업'이 메가 히트에 성공. 그는 두 장의 앨범으로 데뷔 2년 만에 80년 대를 주름잡는 슈퍼스타로 거듭났다. 

“이건 내 노래야!”

10대 스타의 탄생을 목격한 일본. 하지만 그의 활동은 3년 만에 중단됐다. 이름이 알려지자 소속사는 곧바로 대규모 투어 <Last Teenager Apperance>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오자키는 1집 앨범의 히트곡 ‘I Love You’를 따라 부르는 팬들을 향해 “이건 내 노래니까 따라 부르지 마!”라며 화를 내고 공연장을 이탈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 이에 그와 관련된 무수한 소문이 양산됐고, 결국 1986년 1월 1일 투어 마지막 공연이 끝난 다음 날에 기한을 정해두지 않고 활동을 중단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나는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단 노예였을 뿐

활동을 중지한 오자키는 곧장 미국으로 떠났다. 소속사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미국 유학 권유에 인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 미국에서 생활했던 오자키는 가성제에 중독돼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마약 중독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목 상태를 망쳤고,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줬다. 심지어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훗날 오자키는 인터뷰를 통해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인 후쿠다가 나를 묶어놓기 위해 일부러 미국에 보내서 강제로 각성제에 중독시켰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진위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1990년, 7년 동안 족쇄를 채우고 무리한 스케줄을 요구하던 소속사를 벗어나 스스로 ‘ISOTOPE’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공식 팬클럽을 창단했고, 1집에 수록됐던 히트곡 ‘I Love You’의 정식 싱글을 발표하는 등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위해 노력했다. 

행복할 수 없다

그렇게 행복할 줄 알았던 오자키는 계속 고통받았다. 아이돌 ‘사이토 유키'와의 불륜 스캔들, 부인 시게미와의 이혼 소송, 인기와 명성에 비해 어려웠던 경제 형편, 어머니의 사망 등 계속되는 사건에 시간이 흐를수록 무너져 갔다. 

언제까지나 노래할 것을 약속합니다

소속사를 떠나 회사를 설립하고, 투어와 공연을 이어가던 오자키는 불과 2년 후인 1992년에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것처럼 심한 상처와 함께 거리에서 나체로 발견됐다. 그리고 그날 오전 11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2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 이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어려움에도 지지 말아줘. 언제까지나 꿈을 버리지 말아 줘. 여러분들께 나의 사랑을 가득 담아 언제까지나 노래할 것을 약속합니다.” 사망 전 마지막 공연의 끝에서 - 오자키 유타카

불꽃같은 삶을 살다

1983년 데뷔부터 1992년 사망까지 9년 동안 오자키 유타카는 불꽃같이 타오르는 삶을 살았다. 데뷔와 동시에 큰 관심을 받았고, ‘10대의 대변자'라는 거창한 명칭과 함께 10대들의 우상이 됐다. 그는 9년 동안 5장의 정규 앨범을 완성했고, 사망하기 전에 6집 앨범 녹음을 끝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뮤지션'이었다. 

자살이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의문을 남겼다. 당연히 가장 주된 의문은 ‘자살인가, 타살인가'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오자키 유타카만이 대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정답을 알 수 없는 ‘슈퍼스타의 의문의 죽음’은 많은 소문과 루머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정답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쪽의 주장을 먼저 알아보자.

오자키 유타카는 자살했다는 가장 유력한 단서는 사후 부검 결과에서 나왔다. 당시 그가 마약중독에서 벗어난 상태였다는 가족의 주장과는 다르게, 체내에서 각성제 성분이 검출된 것. 각성제 중독자는 혼자 넘어지거나 구르는 등 몸을 잘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몸이 멍들고 다쳤을 수 있다. 또 부검 결과 그가 타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이 ‘사건성 없음'으로 수사를 빠르게 종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는 몇 차례 자살시도를 행한 적이 있으며, 사망 5일 전에는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같이 죽어 줄 수 있어?”라는 질문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전체적인 정황 또한 그의 자살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가 자살, 혹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에 함께 있었던 부인 시게미도 끝까지 그가 폐수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의문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오자키가 길에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갔으며,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곁에 있었다. 

타살이다

반대로 누군가 그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보자.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오자키 유타카의 몸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누군가 일부러 낸 담배 자국도 있었다. 심하게 부어오른 오른쪽 눈 또한 그가 심한 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누가, 왜 그를 폭행하는데?”라는 물음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는 적이 많았다. 전 소속사와도 끝이 좋지 않았는데, 오자키는 공개 석상에서 전 소속사 대표를 거론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인 시게미와도 관계가 좋지 못했다. 불륜과 가정 폭행으로 이혼 소송까지 갔던 둘의 사이가 마냥 평화로웠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전 소속사를 나와 차린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들과의 관계 역시 좋지 못했다. 팬을 채용해서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등 이해할 수 없는 경영으로 투자자들과 자주 마찰이 있었다. 이외에도 적이 많았던 오자키 유타카를 폭행할 수 있는 용의자는 차고 넘쳤다. 특히 끝까지 ‘그의 죽음은 폐수종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던 부인 시게미가 가장 큰 의심을 샀다. 

일본의 80년대를 상징하다

1980년대 일본은 뭘 해도 되는 시절이었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라고 흔히들 말하는 버블경제 시기였고, 오자키 유타카는 그런 호화로운 일본과 함께 전성기를 보냈다. 

1990년, 90년대의 시작과 동시에 거품이 터지면서 경제가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고, 오자키는 199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인들은 화려했던 과거의 버블경제와 함께 일본 음악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오자키 유타카를 기억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그의 죽음에 화려했던 80년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한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타올라 너무 빨리 끝나버린 일본 전설의 싱어송라이터 오자키 유타카, 그의 정신이 담긴 음악을 감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