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그먼트 디자인, 저의 두 번째 이름입니다

나이키 스니커즈 옆에 새겨진 작은 번개 로고로 익숙한 브랜드 ‘프라그먼트 디자인(FRAGMENT DESIGN)'. ‘하라주쿠의 대부(Godfather of Harajuku)’, 후지와라 히로시의 브랜드다. 

프라그먼트 디자인은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와 결이 다르다. 자체적인 제품을 생산하지도 않고, 그 흔한 온라인 홈페이지조차 없다. 그런데 어떻게 브랜드로 인정받을 수 있냐고? 정답은 후지와라 히로시에게 있다. 


‘대한민국에 듀스가 있다면’

한국의 힙합 역사가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 지누션과 김진표 등의 뮤지션들로부터 시작됐다면 일본의 힙합 역사는 후지와라 히로시 때문에 시작됐다. 

그는 갓 20살에 접어들었을 무렵, 일본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그였기에, 해외의 문화를 직접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영국의 수도 런던, 그는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매니저 맥라렌과 만남을 가졌고, 음악에 대한 열정은 더 크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를 미국으로 이끌었다. 먼저 그는 맥라렌을 따라 동부로 향했다. 그리고 뉴욕에서의 경험은 그를 ‘힙합(HipHop)’ 문화에 눈뜨게 만들었다. 

그는 일본으로 가져갈 음반을 수집했다. 당시 일본에는 힙합 문화가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미 새로운 문화를 일본에 전파할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지역마다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음악 스타일을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동부 음악을 제대로 느낀 후지와라 히로시는 곧장 서부로 향했다. 

“어째서 여기에 롤렉스가 있죠?”

중요한 이야기를 못할 뻔했다. 그가 뉴욕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뉴욕의 한 티파니 매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 브랜드의 제품들을 보게 되는데, 바로 롤렉스와 몽블랑 만년필이다.

티파니 매장에서 다른 브랜드 제품을 판매하는 게 이상했던 그는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고, “고객님, 이 제품들은 ‘협업' 제품들입니다.”라는 답변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후지와라 히로시가 프라그먼트 디자인을 창립하고, 운영하는데 초석의 역할을 했다. 

‘집으로'

영감을 찾아 떠난 여행을 마친 후지와라 히로시는 일본으로 금의환향했다. 이곳저곳에서 수집한 음반과 경험을 기반으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힙합 문화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는 수집한 음반을 기반으로 디제잉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 최초 힙합 DJ의 탄생이다.

당시 그는 하라주쿠에서 활동했다. 맞다, 도쿄에서도 패션의 메카로 유명한 하라주쿠. 그는 ‘메이저 포스(MAJOR FORCE)라는 힙합 레이블을 창설했고, 하라주쿠의 뒷골목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LAST ORGY’

패션 신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던 후지와라 히로시는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년 동안 일본의 상징적인 패션 잡지 ‘뽀빠이(POPEYE)’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LAST ORGY’라는 이름의 패션 음악 칼럼을 연재했는데, 이 또한 파급력이 대단했다. 

그가 LAST ORGY 칼럼에 소개하는 음악들은 주목을 받았고, 제품들은 모두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동시에 그의 남다른 시각 역시 널리 알려지며 그는 더 큰 명성을 얻게 됐다. 

이때 후지와라 히로시의 활동에서 영향을 받은 한 남성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나아오 토모아키, 현재 우리가 ‘니고(NIGO)’라는 이름으로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닉네임이 2번을 의미하는 ‘니고(NIGO)’인 이유도 후지와라 히로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니고 역시 그런 닉네임을 불쾌해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캘리포니아 해변의 기적'

이때 당시에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해변가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옷과 서핑 보드를 판매하던 인물이 있었다. 후지와라 히로시는 취재를 위해 캘리포니아를 찾았고, 이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심플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그의 작업에 매료됐다. 

관심 있는 분야와 취향이 비슷했던 덕분에 둘의 관계는 빠르게 발전했다. 후지와라 히로시는 그로부터 일본에서 제품들을 팔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고, 히로시는 그의 싸인이 담긴 제품들을 일본으로 가져와 판매했다. 그리고 그 브랜드는 훗날 일본 스트리트 패션 신의 아이콘이 됐다. 아, 그래서 브랜드 이름이 뭐냐고? 후지와라 히로시가 일본에 전파한, 당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브랜드 이름은 ‘스투시(Stussy)’다. 

션 스투시는 일본이 4면이 바다인 만큼, 서퍼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지와라 히로시라면 일본에 브랜드를 잘 정착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스투시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스투시 브랜드 역시 독특한 무드와 개성을 필두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다. 후에 션 스투시는 후지와라 히로시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때 히로시의 대답은 아주 유명하다. “저는 DHL(택배) 받은 것 밖에 없습니다.” 

‘전설의 시작'

메이저 포스 활동으로 후지와라 히로시는 유명 인사가 됐다. 하라주쿠 스트리트 신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자연스럽게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아티스트 ‘SK8TING’과 친분을 쌓았고, 함께 브랜드 ‘굿 이너프(GOOD ENOUGH)’를 설립했다. 

굿 이너프는 제품을 소량 생산해서 판매하는 전략을 취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는데 스투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굿 이너프는 일본 스트리트 패션 신에 막대한 영향을 줬다. 소량 생산, 한정 판매라는 독특한 방식과 베이직한 실루엣의 아우터, 셔츠 위에 브랜드 로고를 새겨 넣는 방식의 디자인은 90년대 멋쟁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디에도 없다’

그가 일본 스트리트 신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는 물론 직접 창립한 브랜드의 성공적인 업적에도 있지만, 그의 도움으로 탄생한 브랜드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그는 훗날 베이프를 창립하는 니고와 언더커버를 창립하는 준 타카하시가 ‘NOWHERE’ 스토어를 성공적으로 론칭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당연하게도 베이프와 언더커버의 성공적인 창립에도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외에도 더블 탭스와 네이버후드의 창립에 원조했다. 어디 이뿐이랴, 지금은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가있는 비즈빔의 나카무라 히로키와도 친분이 있었던 그는 브랜드의 상징적인 아이템인 ‘모카신(FBT)’ 제작에 대한 영감을 제공했다. 

쉽게 말해서 일본에서 탄생한 대부분의 유명 브랜드가 후지와라 히로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요망한 번개의 탄생'

두 개의 번개가 사선으로 배치된 ‘프라그먼트 디자인(FRGMT)’의 번개 로고는 1994년에 탄생했다. 후지와라 히로시는 ‘Electric Cottage’라는 브랜드를 잠시 전개하며 번개 로고를 처음 사용했고, 훗날에 브랜드에 사용됐던 번개 로고를 일부 수정해서 지금의 프라그먼트 디자인 로고를 탄생시켰다.

‘그의 손길이 닿았다는 의미'

프라그먼트 디자인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브랜드에서 자체적인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타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전개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운영이 가능했던 이유는 후지와라 히로시의 명성에 있다. 모두가 그와의 파트너십 관계를 원하기 때문. 프라그먼트 디자인의 번개 로고는 그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증표'와도 같다. 

‘문화 대통령'

정리를 해보자. 그는 일본의 힙합 문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다량의 앨범을 보유한 아티스트이다. 또한 개인 브랜드를 론칭하며 스트리트 패션 신을 형성했고, 다른 수많은 브랜드의 설립에 일조했다. 

그의 활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건재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프라그먼트 디자인을 통해 유수의 브랜드와 협업하고 있다. 패션은 물론이고 IT, 자동차, 라이프스타일 등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나 일본의 문화를 최전선에서 이끄는 ‘문화 대통령'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이다.